▲ 김규종<br /><br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1483~1536)는 비텐베르크 대학교회 정문에 `95개조 반박문`을 게시한다. 반박문의 핵심은 교황청이 판매하는 면죄부의 능력과 효용성에 관한 것이었다. 교황청은 11세기 말부터 면죄부를 판매해왔다. 면죄부란 `로마 가톨릭 교회가 죄를 용서하는 대가로 금품을 받고 발행한 증명서`로 그 심장부는 교황청이었다.

루터가 반박문을 내건 16세기에는 면죄부를 사면 그것을 구입한 사람은 물론, 이미 연옥(煉獄)에 있는 가족도 그곳을 벗어날 수 있다는 등 면죄부 폐해가 극대화되기에 이른다. 이에 루터는 성경에 근거를 두고 교황청의 상업성, 즉 돈을 받고 구원을 약속하는 종교계의 장삿속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약관 34세의 성직자가 면죄부를 팔아 부(富)를 축적하는 로마 교황청과 교황의 권위를 부정하고, 교회의 부패상을 고발한 것이다.

16세기 이후 유럽이 `지리상의 발견`과 자본주의로 근대를 열어나갈 때 교회는 과거의 유습에 허우적대고 있었고, 그 정점이 면죄부였다. 유럽의 근대를 생각할 때 종교개혁을 떠올리는 것은 시대에 역행하는 불의하고 부패한 종교 세력에 대한 개인의 저항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루터가 권력과 불화하고 민(民)의 이해관계를 시종일관 대변했던 것은 아니다.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1777~1811)의 소설 `미하엘 콜하스`에 등장하는 루터는 영주의 부당한 통행세 징수에 거부하고 봉기한 마상(馬商) 콜하스를 지지하지 않는다. 종교개혁의 대의를 실천한 루터가 민중봉기로 심기가 불편한 왕가와 권력자에게 부역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소설의 루터가 현실의 루터와 얼마나 가까운지, 하는 것은 논외로 하자. 그럼에도 1568년은 루터와 종교개혁에 관하여 우리에게 적잖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죽음을 목전에 둔 플랑드르의 화가 피터 브뤼겔(1527~1569)은 `장님의 우화(1568)`라는 그림을 그린다. 벼랑 위에 나있는 좁은 길을 장님 여섯 사람이 허위허위 걸어간다. 첫 번째 장님은 벌써 구덩이에 빠졌고, 두 번째 장님도 자신의 운명을 감지한다. 하지만 세 번째 장님은 아직 사태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평온한 얼굴이다. 그 뒤를 따르는 세 사람의 장님 역시 태평한 얼굴이다.

마을 한복판에 큰길이 있지만, 장님은 그 길을 걸어갈 권리가 없다. 그들은 어쩔 도리 없이 위태로운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녹음이 우거진 나무들로 보건대 계절은 여름으로 치달린다. 하지만 장님들은 두터운 겨울옷과 작별하지 못했다. 그들 모두 구덩이에 빠지리란 것은 자명하다. 그러하되 대로 뒤편에 서있는 교회는 침묵하고 있다. 장님들의 고단한 운명과 아무 상관없다는 표정이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지 반세기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사회적 약자의 권리는 신장된 것이 없다는 브뤼겔의 통찰이 아프게 다가오는 그림이다. `마태복음`에서 화제(畵題)를 따왔다는 `장님의 우화`는 `장님이 장님을 인도하면 모두가 구렁텅이에 빠진다`는 내용을 함축한다. 잘못된 지도자가 대중을 파멸로 인도한다는 것이되, `오불관언(吾不關焉)`하는 교회의 수수방관은 보는 이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작년 10월 28일 시작된 촛불집회로 2017년 대한민국은 전기(轉機)를 맞이하고 있다. 연인원 1천600만이 참가한 촛불집회로 드러난 시대의 갈망이 정권교체로 확인되었다. 정권교체 이후 종교세 도입이 언론에 보도되었다. 천주교와 불교계의 일각은 종교세 도입을 환영하고 있지만, 대다수 개신교 쪽에서는 수용할 태세가 아닌 듯하다.

한국사회의 성역 가운데 하나가 종교계다. 부자세습도 모자라 삼대세습을 일삼고, 부정과 불의가 일상화돼 있는 공간. 세상의 변화와 담 쌓고 성채(城砦)에 갇혀 사는 자들은 1517년 루터의 외침과 저항, 1568년 브뤼겔의 장탄식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2017년 한국교회가 한번쯤은 성찰해야 할 사건과 인물들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