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권선희
지난해 여름, 민족작가회의에서 객원문예교사제도를 운영한 적이 있었다. 전업 작가들을 초빙하여 지도하려는 전국의 중고등학교들은 다투어 신청서를 제출했고, 엄격한 서류심사를 거쳐 우리 지역의 영일고등학교가 선정되었다.

그리고 나는 선정된 학교지역에 거주하는 이유로 작가회의 경북지회장의 추천을 받아 우연히 학교로 출강하게 되었다.

처음엔 경험이 없는 내가 고등학생들 앞에서 무엇을 가르쳐야할까 막막했다. 마치 개척교회의 전도사처럼 처음 들어선 교실에서 나는 이 작은 자리를 계기로 이중 몇몇은 문학이라는 종교를 평생 따라주기를 내심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곧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문장의 기교와 이론적인 측면 이전에 부족하나마 작가로 살아가는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고, 친구로 선배로 혹은 부모로, 용기 내어 다가갔다. 그렇게 총 15회의 강의가 막을 내릴 무렵, 나는 수없이 내가 사는 마을의 풍경과 애환을 들려주었고, 그들은 그것을 궁금해 했으므로 ‘구룡포 기행’ 이라는 타이틀로 그들을 초대했다.

토요일 오전 9시, 사오십 명의 학생들은 지도교사와 함께 녹내 바닷내 풀풀 나는 읍내 마을 버스정류장에 도착했다.

말끔하게 사복을 차려 입은 아이들이 스쿨버스에서 쏟아질 때 나는 노란 비타민을 생각했다. 살구 같기도 하고 토마토 같기도 한 모습들이 온 읍내를 환하고 상큼하게 일으켜 세웠다. 풍선처럼 부푼 건 다름 아닌 내 마음이었다. 그들을 감척어선으로, 시장으로 안내하면서 거미가 실을 뽑듯 가슴 속에 살던 말들을 늘어놓는 내가 놀랍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데려간 곳은 용왕당 공원, 적산가옥(敵産家屋)을 지나며(태풍이 지나기 전이라 형태가 제법 고스란히 남아 있었음) 한 편의 소설처럼 지나간 역사를 더듬기도 했는데, 아이들의 반응은 너무나 기특했다. 그들 스스로 찾고 물으며 역사를 되짚는 것이었다. 우리는 용왕당 공원에 올라 한 눈에 보이는 포구를 향해 섰다. 가슴을 후련하게 열고 계단에 걸터앉은 아이들의 볼들이 발갛게 익어 있었다. 오래된 신사(神社) 정원을 거닐며 짧은 소견으로 주섬주섬 설명하는데도 아이들은 누구하나 지루해하거나 무리를 이탈하지 않았다. 일정은 모두 끝났지만 나는 아이들을 그냥 보낼 수 없었다. 아쉬웠다. 읍내 중국집이라는 게 테이블 서너 개가 고작이라 많은 아이들에게 그 흔하디흔한 자장면 한 그릇 먹이는 일도 쉽지 않았다. 요즘 아이들에게 자장면이란 뭣이 그리 대단한 음식이겠는가 싶었지만 나는 그들이 구룡포라는 포구와 자장면을 오래토록 잊지 않았으면 하는 욕심을 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녀석들 조그맣게 소곤거리는 게 가관이었다. 한 상급생이 하급생들에게 “얘들아, 되도록이면 자장면으로 해. 선생님 부담이 너무 크잖아.” 그런 녀석들이었다. 덩치 큰 남학생들은 곱빼기를 주문해도 모자랄 텐데 한결같이 “그냥 자장면이요”라고 주문을 했다. 아이들은 다시 하나 둘 스쿨버스에 올랐고, 나는 홀로 남아 손을 흔들었다. 모퉁이를 돌아나가는 버스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나는 지금, 오늘 받아온 원고들을 읽고 있다. 학생들을 위하는 마음이 너무나 크신 교장선생님의 마치 구애(?)에 가까운 섭외로 매주 화요일이면 그들을 다시 만나고 있다. 처음엔 부족한 능력도 능력이지만, 먼 거리의 내 집에서 학교까지, 그것도 저녁시간에 오가는 것이 내심 걸려 몇 번이고 거절했지만, 지금은 이러한 시간에 감사한다. 글 한 편에 한 녀석씩 싱긋싱긋 웃으며 떠오른다. 남에게 보여주는 글이 아니라 아픔이나 부끄러움까지도 활짝 열어놓은 자신만의 글들을 쓸 줄 아는 마음들이 기특하기만 하다. 가둔 교복 속에서도 반짝이는 그들의 눈을 통해 나는 많은 것을 얻고 있다. 앞서 살아가는 사람으로는 가장 행복한 일중 하나인 ‘들려줌’을 통해 몇 갑절 충전되는 내 삶을 살기 때문이다.

그들이 작가로의 삶을 살아가든 그렇지 않든, 대회에 나가 수상을 하든 못하든 그것은 이미 별개의 문제인지도 모른다.

잘잘한 글씨로 풀어놓은 작은 슬픔과 기쁨들, 그 곁에 붉은 글씨로 다독임을 적는 일,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아름다운 만남, 그 안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윤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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