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여년 전 이해랑 선생님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지역에 남아 연극을 열심히 지켜달라던 선생님의 말씀, 선생님의 뜻을 이제야 이룬 것만 같아 가슴이 벅찹니다”

제14회 이해랑연극상을 수상한 연극인 김삼일씨(62). 김씨는 이해랑연극상이 제정된 이후 지역 순수 지역인으로서는 처음 수상하는 영광도 함께 안았다. 때문에 이번 수상은 김씨 뿐 아니라 지역에서 묵묵히 땀 흘리고 봉사하는 숨은 연극인들에게 그야말로 ‘힘’이 되고 있다.

김씨의 연극인생은 4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42년 울산에서 태어난 김씨는 17살이 되던 해 조부의 고향인 포항으로 내려와 1963년 대학진학도 포기한 채 KBS 포항방송국 성우로 입사했다. 방송국에서도 회사일 보다는 ‘연극인’으로 불릴 정도로 타고난 기질을 감출 수 없었던 김씨는 이듬해인 1964년 포항최초의 극단 ‘은하’를 창단했다. 당시 변변한 연습실 하나 없어 이리저리 떠돌아야 하는 열악한 실정이었다. 밤 10시 이후에는 포항시립도서관에서 청소를 해주는 대신 공간을 빌려 연습을 해야만 했다.

“힘든 시기였지만 너무나 소중하고 가치 있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시간이었습니다. 그곳에 있던 연극관련서적들을 읽으면서 연극에 대한 많은 것을 배우고 연극인생을 설계했으니까요”

당시 포항시립도서관에 비치되어 있던 연극서적들은 지금의 ‘연극인 김삼일’ 을 있게 한 모태였다.

몇 안 되는 책 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미국의 작은 어촌 마을에서 시작해 뉴욕 연극을 활성화시키며 노벨문학상까지 수상했다는 극작가 ‘유진 오닐’의 단막극 ‘고래’는 김씨가 포항이라는 당시 작은 어촌마을에 연극을 뿌리 내리게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또 유치진, 이해랑, 김동원 선생 등 원로들의 발자취를 한자 한자 엿보며 ‘연극은 목숨을 걸만한 예술이다’라고 깨닫고 ‘이제부터 포항연극은 내가 일구어 낸다’라고 결심했다.

책을 통해서 알게돼 김씨의 연극인생의 지표가 된 이해랑 선생과 김씨의 인연은 1966년 ‘이해랑 이동극장 단원모집’ 공고 때문이었다. 당시 김씨는 서울에서 이해랑선생을 직접 만났지만 얻은 것은 서운함 뿐이었다.

“여보게, 자네는 포항 연극을 지켜주어야겠어, 다시 포항으로 내려가는 것이 좋겠어”

당시 서운함과 좌절감은 말할 수 없었지만 선생의 말을 새겨듣기로 했다. 이후 포항에서 연극에 더욱 매진한 그는 19년 만에 이해랑 선생과 재회했다. 바로 제3회 전국연극제에서 김씨가 연출을 한 ‘대지의 딸’이 대통령상을 수상했기 때문이다. 이해랑 선생이 당시 연극제의 심사위원이었던 것.

“그것 보게, 나는 자네가 해낼 줄 알았네”

40여년간 80여편의 연극을 연출한 김씨는 지역에서는 ‘사실주의 연극’의 대부이기도 하다.

“연극이란 인간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숨겨진 삶, 즉 영원성을 함께 보여줘야 하는 것입니다. 눈으로만 즐기는 재미가 아니라 광대무변한 인생의 깊은 뜻을 보여줘야 하는 것이죠”

작은 어촌 마을 포항에서부터 시작해 40여년간 포항연극을 이끌어온 ‘포항연극지킴이’ 김삼일씨.

그에게는 지금 절실한 또 하나의 소원이 있다. 바로 민간극단들의 마음 놓고 공연할 수 있는 보금자리인 ‘소극장’을 갖는 것.

“사람에게 집이 없으면 그야말로 떠돌이죠. 배우는 극장에서 다시 태어나고, 자라고, 살면서, 죽음을 맞이해야 합니다. 변두리라도 민간극단들이 1년 12달 공연할 수 있는 소극장이 빨리 자리 잡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한다.

/글=최승희기자 shchoi@kbmaeil.com, 사진=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윤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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