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약간의 바위문화와 이미 만났다. 용바위, 얼굴바위들. 그럼 이 시점에서 바위문화란 무엇인가에 대해 한번쯤 정리하고 다시 길을 따라 가 보기로 하자. 이점에 대해 이번 호는 바위문화의 자의성, 환시성, 양의성, 관행성과 다 시점의 문제에 대해 거론하기로 한다.

인간은 궁극적으로 낯섦을 싫어한다. 낯선 것에 대한 본능적 두려움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경험 안에서, 그 자신의 인식에서 질서에 맞지 않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을 다시 질서에 맞고 규칙적인 것으로 돌리고자 노력하게 된다.

아는 것, 익숙한 것에 기대어 설명하고, 안도하고픈 의식이 인간의 심리에는 숨어 있다.

그렇게 질서를 찾게된 것에 성현(聖顯 Hierophany)이 끼어들면 성역화하며, 여기서는 금기시해야 할 행위나 어떤 형태로든 신앙적 의식을 추가한다.

작은 돌을 주워 던진다거나 성냥알맹이를 꼽거나 동전을 바치는 행위도 여기서 기인된 행동이다.

이렇듯 스스로가, 그리고 이를 만나는 이에 의해 질서를 얻게 된 바위문화에서는 보는 이의 자의적 요소가 강할 수밖에 없다. 형상인식에서 다소 환시적 요소가 작용하는 것도 그 자체 완전도가 약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시각은 완전치가 못하다. 그 불완전성은 완전성을 갈구하게 되며 바위문화에서 환시성은 여기서 기인하는 것이다. 가령 남해 금산의 거북바위는 바위의 오른편은 비교적 완전하게 드러나는 거북이다. 그러나 그 좌측은 천연적인 바위가 어설퍼서 그 형상을 유추할 수가 없다. 그래서 무명의 바위 예술가는 특정위치에서 볼 것을 요구, 그 곳을 지적하여, 특정 지점에서 잘 드러나는 거북형상의 엉치뼈 부위에 거북꼬리를 새겨 놓았다. 이점은 보는 이의 환시적인 시각을 빌려 거북바위를 완성하게 하는 것이다.

바위문화는 이중성을 띄고 있다. 어떤 이가 거북바위라 본 것은 다른 이에 의해 무참히 거부되기도 하는 것이 바위문화이다.

경주 남산 용바위의 경우 전체를 보느냐 부분을 보느냐에 따라서 그것이 용이냐 거북이냐 하고 엇갈릴 요소가 있다.

용으로 본 이는 몸의 또아리를 강조하여 그곳을 그렇게 보이게끔 쪼아 놓았다. 그런가 하면 거북의 요소를 발견한 이는 몸체의 구불구불한 부분을 격리하려는 생각으로 일정한 부위에 손을 봐서 거북으로 보이도록 해 놓았다. 그런 요소는 바위문화의 이중성을 지적하게 한다. 나중에 거론될 속리산 수정봉의 거북 역시 그러한 점이 발견된다. 들어서는 길목에서 보면 거북으로 인식되는 바위의 머리가 반대편에서 거꾸로 오르면 마치 우람한 남근을 엿보게 한다. 이렇듯 이중성은 자연스럽게 시선의 방향을 고려하게 하였다. 그 보게되는 지점이 어디인가에 따라서도 매우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바위그림의 요소에서 흥미 있게 본 것이 다 시점의 표현이다.

다 시점이란 것은 하나의 사물을 보는 시각의 방향이 여러 개 임을 이른다. 개체를 보는 방향에 따라 각 방향에서 본 형상을 한 화면의 그림에 구현하는 것이다. 마치 아동화를 보는 것과 같이, 예를 들면 컵에 담긴 꽃을 그리라면 꽃은 그것이 가장 잘 드러나는 정면에서 본 형상을 그리며 컵은 물이 담기는 위에서 봐서 둥글게, 옆면은 측면에서 본 형상에 따라서 바닥을 평면으로 본 가로 선으로 그린다거나 하는 것처럼 시점의 다각화를 구성한다.

바위문화에서도 다각화된 시각으로 그 대상을 봐야하는 면이 있다. 개체를 구성하는 바위의 요소에서 그것이 가장 잘 드러나는 위치가 각각 달리 정해지는 예는 수정봉 거북바위가 그렇고 금산의 거북바위가 그러하며 속리산 문장대의 매 바위 또한 그렇다.

속리산 문장대의 매 바위는 정면에서는 한 마리 고운 비둘기와 같다. 그러나 한 마리의 매임을 인식하지 못하는 이에게는 바위는 단지 비둘기 닮은 선바위로 그만이고, 뒤로 이어진 바위들은 그냥 돌이 쌓인 누석에 불과하나 매를 인식하고 바위문화로 보는 눈에는 그것은 훌륭한 날개가 되고 깃을 쉬고있는 매의 몸체가 된다. 이러한 것이 소박한 의미의 다 시점의 표현이다.

관행에서 오는 시각에 의해 형상이 인지되는 예도 있다.

얼굴은 사람에게 가장 익숙하기 때문에 아무런 관계도 없는 몇 개의 선이나 점만으로도 얼마든지 그 표현이 가능하다.

평면 위에 역삼각형으로 점 세 개만 찍어 놓아도 우리의 관행은 그것을 얼굴로 여김에 부족함이 없다. 바위문화에서 찾아낸 얼굴도 이처럼 소박한 것이 더러 있다.

장성 갈재의 미인바위가 그렇게 간단한 형용으로 얼굴을 드러낸다. 둥근 바위 봉우리를 윤곽으로 하여 옆으로 찢어진 두 눈과 입을 나타낸다. 그러나 윤곽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영주 가흥동의 용 바위는 바위의 수직면에 6개의 바위구멍으로 얼굴을 형용한다. 그러므로 윤곽이 있다, 없다는 별 문제가 안 된다. 이것은 관행적인 시각에 의해 인지되는 형상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의성, 환시성, 양의성, 관행성, 다 시점의 요소에 의해 적절한 인공이 가해진 바위를 우리는 ‘바위문화’라 하여 구별하고 이제까지 몇 점 봐왔다.

다음 장에서는 바위가 지닌 상징성과 거기서 건져 올린 세계도처의 중요바위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이하우 암각화 연구가>

    윤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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