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살로메
새벽 4시, 의림지는 맹춘(孟春)의 한 가운데에 있었다.

입춘, 우수가 지났는데도 저수지는 아직 동면 중이다. 방죽을 따라 밝힌 가로등은 얼어붙은 의림지의 풍광을 만끽하는데 더할 나위 없는 소품이 되고 있다.

경주에서 탄 밤 기차는 중앙선을 따라 내륙 깊은 곳으로 내달린다.

기차는 규칙적으로 덜컹거린다.

영천, 안동, 영주를 거쳐 제천을 향하는 동안 쉽게 잠들지 못한다.

제천시의 초대로 민족문학 작가회의 울산지부에서 마련한 문학기행에 동참하는 길이었다.

제천과 단양 일대의 문화 유적지를 둘러보고 저마다의 문학적 소양을 충전하는 자리였다.

네 다섯 시간을 달려 기차는 목적지에 다다른다. 새벽 4시가 조금 넘었을 것이다. 문우들 일행이 찬 손을 비비며 제천 역사를 빠져나갔을 때 기다리던 것은 따뜻하게 데워진 관광버스였다. 그것도 모자라 제천시청의 홍보담당 선생님이 손수 마중까지 나와 환한 미소를 짓는다. 일요일, 한참 단잠에 빠져있어야 할 새벽 시간을 내어 도우미 역할을 자청하는 정성에 모두들 숙연해진다. 한 시인의 위트 있는 답례가 이어진다. “문화를 이해할 줄 아는 제천시의 감동행정의 현장에 여러분은 동참하고 계십니다.”

얼어붙은 의림지가 볼 만한 것이라며 그분은 예정에 없던 새벽 기행을 주선하신다. 정작 제천 홍보를 담당하는 자신도 새벽에 의림지를 돌아보는 것은 처음이라 했다. 김제의 벽골제, 밀양의 수산제와 더불어 삼한시대에 축조된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된 저수지라고만 알고 있었던 의림지는 생각보다 넓고 수려하다.

삼한시대의 수리시설이었다는 것만으로 의림지를 말하기엔 내 정서가 너무 낭만적이라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다행히 현재는 사적지로서의 기능뿐만 아니라 유원지로서도 그 명성을 더해간다니 괜한 감상에 젖은 것만은 아니라는 위안을 가져본다.

문우들을 따라 조심조심 저수지의 얼음을 밟아본다. 먼저 도착한 청춘 남녀들 몇몇이 왁자지껄하다. 청춘의 특권인양 그들이 내지르는 괴성은 새벽을 밝히는 오렌지색 가로등에 박혔다가 이내 찬 공기를 가로질러 저 먼 우주까지 내닫는다. 그 순간 하늘을 올려다본 사람들은 속으로 탄성을 질렀을지도 모른다. 아직 제 집으로 돌아가지 않은 샛별 무리가 흰 눈송이처럼 허공에 달려있었기 때문이다. 최근에 보지 못한 크고 깨끗한 별. 그 별무리 사이로 걸려있는 그믐달은 칼날처럼 아리다. 별빛과 달빛이 전해주는 깨끗하고, 때론 아린 전설을 들으며 의림지는 겨우내 차디찬 결빙의 시간을 견뎌냈을 것이다.

누군가가 가져온 포항의 명물 과메기가 얼음 위로 납신다. 저수지 가장자리에 있던 나무탁자가 옮겨지고, 소주 몇 병도 찬조출연을 한다. 신 새벽의 의림지에 삽시간에 목로주점이 차려진다.

포항 바닷가의 과메기가 내륙 깊숙한 제천까지 와서 제 참맛을 자랑한다. 소주잔이 도는 동안 젊은 시인이 수줍은 목소리로 오 솔레미오를 노래한다. 이 순간만큼은 의림지의 명물이라는 공어(빙어)도 질투하지 않았을까 할 정도로 과메기와 소주는 금세 동이 난다.

새벽 공기를 가르며 모두들 의림지 방죽길을 걷는다. 의림지의 또 다른 볼거리인 몇 백년은 좋이 보낸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장관을 이룬다. 몇 백년을 구비친 소나무 허리춤은 달관의 경지처럼 제 몸을 자유롭게 부려놓았다.

성질 급한 몇몇은 휘청거리는 머리칼을 물 속에 담갔다가 겨우내 얼어붙어 꼼짝하지 않는다.

잔설과 모래가 뒤섞여 방죽 위를 걸을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난다. 귀하게 보는 눈을 구경하느라 고개를 숙이니 잔설 사이로 파릇한 새잎이 움트는 게 보인다. 그러고 보니 저수지 가장자리가 녹아있어서 물에 빠질 뻔한 게 떠오른다. 삶이란 저 물 위를 덮었다 덧없이 소멸할 얼음장같은 것이라고 단정지어 본다.

맵찬 새벽 공기를 뚫고 아침은 오고, 머지않아 봄 햇살도 내릴 것이다. 이제 우리가 떠난 자리엔 해빙기에 그 맛을 더한다는 공어 낚시꾼이 대신할 것이다. 저 멀리 이른 공어 낚시꾼의 그림자가 보이는 듯 하다. 공어 낚시꾼처럼 해빙의 꿈을 안고 다음 행선지를 향해 길을 떠난다.

<김살로메 약력>

1965년 안동 출생

경북대 불문과 졸업

‘포항문학’ 소설 신인상 당선(2003년)

영남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2004년)

    윤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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