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병철<br /><br />시인
▲ 이병철 시인

나는 살면서 금품 갈취를 두 번 당했다. 모두 유년 시절의 일이다. 처음은 1994년 봄, 초등학교 4학년 때다. 비디오 게임기 게임팩을 사러 친구와 용산전자상가에 갔다. 신용산역에서 내려 길고 어두운 지하도를 나오자마자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불량소년들에게 붙잡혀 뒷골목으로 끌려갔다. 도루코 면도칼을 들이밀며 집 전화번호를 물었다. 가진 돈을 내놓지 않으면 집으로 찾아가겠다고 했다. 겁먹은 나는 거의 울먹이며 “오팔칠에 이공이륙이요.” 그렇게 주머닛돈을 다 털린 채 다시 음습한 지하도를 지나 빈손으로 집에 돌아왔다.

그날 이후 용산전자상가에 갈 때는 반드시 돈을 운동화 속에 숨긴 채 행인 중 남자 어른 뒤에 딱 붙어다녔다. 아빠와 같이 온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서였다. 지하도를 나오면 게임기 가게로 전력질주했다. 고린내 나는 운동화 깔창에서 구겨진 지폐를 꺼내 내밀 때마다 가게 주인 눈치를 봤다. 마치 침투작전 수행하는 군인처럼 긴박했다. 그렇게 한두 해 가슴 졸이며 다니다가 비디오 게임에 흥미가 없어졌다. 비디오 게임기가 컴퓨터로, 컴퓨터가 노트북으로, 노트북이 스마트폰으로 대체되는 동안 어른이 됐다.

중학교 1학년 때 동네에 `용범이`라는 `날라리`가 하나 있었다. 두 살 위 형이었다. 오락실과 사철탕집이 마주하고 있는 골목이 그의 구역이었다. 어느 겨울날, 길에서 그와 맞닥뜨렸다. 돈을 내놓으라고 했다. “뒤져서 나오면 십 원에 한 대씩”이라고 협박했다. 진짜 한 푼도 없다며 주머니를 털어 보이는 시늉을 하자 길을 터줬다. 친구와 함께 가슴을 쓸어내렸다. 사실 주머니에 천 원짜리 몇 장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근처 노점에서 계란빵 사먹다가 용범이에게 들켰다. 사철탕집 골목으로 끌려들어가 흠씬 맞았다. 라면 사서 끓여먹자던 친구의 주장을 계란빵으로 일축한 나는 친구로부터 온갖 원망의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때 이후 지금껏 돈을 뺏기거나 험한 꼴 당하지 않았다. 대개 그런 일은 소년들의 뒷골목에서 일어나고, 나는 그 골목을 일찍이 떠나왔다. 이제는 그 시절의 억울하고 분했던 마음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속된 말로 `삥 뜯기는` 일을 살면서 다시 겪을 리는 없을 것 같다.

그들도 나처럼 생각했을 것이다. 유년의 뒷골목도 아니고,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의 산길도 아닌 곳에서 대뜸 길 막고 돈 내놓으라 겁박하는 날강도를 만날 줄 과연 상상이나 했을까. 돌아가신 부친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선산 장지로 가는 길, 장의차를 막아 세우고는 통행료를 요구한 마을 주민들에게 500만원을 갈취당한 유족들 이야기다. 유족들 입장에서야 자식 된 도리로 탈 없이 장례를 치르고 싶고, 또 마을 주민들과 괜히 불화했다가 부모 묘소가 해코지 당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들 것이다. 강도야 다 똑같은 강도지만, 칼 든 강도보다 어쩌면 더 나쁜 자들이다. 상을 치르는 유족들의 절박한 상황을 악용해서 `마을발전기금`이라는 명목으로 `삥`을 뜯는 게 관습이라고 한다. 그렇게 갈취해서는 마을 발전은커녕 술 마시고 노름하고 유흥으로 탕진한다.

이런 일들이 계속 있어왔고 지금도 흔하다. 최근 이슈가 되면서 국민들의 분노를 사니까 경찰이 수사를 시작했다. 마을 주민들이 사과하며 유족들에게 350만원을 돌려줬다는데, 후일담을 들어보니 마을 주민 자녀들이 “돈을 요구한 것은 옆 마을 사람들”이라며 발뺌하고 있단다. 반성을 안 하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보도된 충남 부여 옥산 외에도 여러 곳에서 비슷한 악덕 행위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지난 18일, 더불어민주당 신창현 의원이 장례절차를 방해하는 행위를 금지하는 `장사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발의했는데, 이번 기회에 그 몹쓸 강도짓들이 뿌리 뽑히길 바란다. 무슨 놈의 `용범이`들이 이토록 많은 세상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