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희 덕

고추밭을 걷어내다가

그늘에서 늙은 호박 하나를 발견했다

뜻밖의 수확을 들어올리려는데

흙 속에 처박힌 달디단 그녀의 젖을

온갖 벌레들이 오글오글 빨고 있는 게 아닌가

어찌 보면 소신공양을 위해

타닥타닥 타고 있는 불꽃들 같기도 했다

그 은밀한 의식을 훔쳐보다가

나는 말라가는 고추대를 덮어주고 돌아왔다

가을갈이를 하려고 밭에 다시 가보니

호박은 온데간데 없었다

불꽃들도 흙 속에 잦아든 지 오래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녀는 어느새 젖을 다 비우고

잘 마른 종잇장처럼 땅에 엎드려 있는 게 아닌가

스스로의 죽음을 덮고 있는

관뚜껑을 나는 조심스럽게 들어올렸다

한 웅큼 남아 있는 둥근 사리들!

고추밭에서 익은 늙은 호박이 검은 벌레들에게 제 살갗을 다 주고 잘 마른 종잇장처럼 죽음을 맞이한 모습을 보고 시인은 거룩한 소신공양을 읽어내고 있다. 자신의 몸을 내 주어 수많은 생명을 살려내고 죽은 하찮은 호박의 얘기지만 이기적인 인생들을 향한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는 것이리라.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