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재휘<br /><br />논설위원
▲ 안재휘 논설위원

지난 2003년에 출간된 영국 캠브리지대학교 경제학부 장하준 교수의 명저(名著) `사다리 걷어차기`는 선진국들의 성장 신화 속에 숨겨진 은밀한 역사를 구체적 자료에 근거하여 논증했다. 이 책에서 장 교수는 선진국들이 개발도상국 및 후진국들에게 강요하는 정책이나 제도의 모순과 위선을 날카롭게 꼬집는다. 높은 곳에 먼저 올라간 존재가 더 이상 못 올라오게 사다리를 걷어차 버리는 못된 행태는 경제에만 있는 게 아니다.

전남 여수에서 열린 지방자치의 날 기념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지방분권 정책 이정표를 내놨다. 제2국무회의를 제도화하고, 지방자치단체를 지방정부로 개칭하는 내용과 입법권·행정권·재정권·복지권의 4대 지방 자치권을 헌법에 담겠다는 것이다. 뿐만이 아니다. 국가기능의 과감한 지방 이양을 위해 내년부터 `지방이양일괄법` 제정을 단계별로 추진하고, 지방재정 분권을 위해 국세와 지방세 비율을 7대3으로 조정하겠다고 강조했다.

이날 문 대통령이 밝힌 내용들은 지방분권을 위해 필요한 모든 의제를 총괄하고 있다. 정부도 이에 발맞춰 광역단위 자치경찰제 도입, 주민투표제 및 소환제 활성화 등 향후 5년간 추진할 자치분권 로드맵을 발표했다. 또 시·도 소방본부에 소속돼 있는 지방직 소방공무원 4만4천792명을 국가직으로 전환하고, 현 정부 임기 내 소방 현장인력 2만여 명을 확충하겠다고 밝혔다.

지방분권형 개헌을 염원해온 지역민들에게 이보다 더 좋은 소식은 없다. 호불호를 떠나서, 문재인 대통령만큼 지방분권을 위해 옹골차게 의지를 밝힌 지도자가 있지 않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행정수반이 이토록 힘차게 깃발을 들고 일어섰으니 마치 지방분권형 개헌의 숙원은 다 이뤄질 듯한 낙관이 스며든다. 하지만 정말 이 길이 그렇게 녹록할 것이라고 믿는 것은 바보짓이다.

많은 이들이 벌써부터 국회가 가장 큰 걸림돌이 될 것이라는 걱정소리를 늘어놓는다. 1년 365일 땅따먹기 권력쟁패에 여념이 없는 정치꾼들이 중앙집권체제로 누려온 무소불위의 권력을 그렇게 호락호락 내려놓을 성 싶으냐는 비아냥조차 나온다. 실제로도 그렇다. 여의도 정치권에서 `지방분권형 개헌`에 대한 신실한 열기를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허구한날 상대방의 썩어빠진 쓰레기통이나 둘러엎고, 사사건건 사보타지나 일삼는 무리들은 가짜 만병통치약 팔듯 엉터리 `민심`을 팔아먹는다. 제아무리 시대적 과제라고 해도 그런 정치꾼들이 `지방분권형 개헌`을 흔쾌히 사명으로 걸머질 이유가 있을까보냐는 예단이 횡행한다. 국회가 정말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지리멸렬한다면 큰일이다.

대다수 중앙관료들의 엘리트 의식도 만만치 않다. 그들의 뇌리는 `지방에 재정과 권한을 주면 말아 먹는다`는 논리에 절어있다. 하지만 그 속내에는 결국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부박한 탐욕이 자리하고 있다. 권한을 넘겨주지도 않고 주야장천 부정론만 펴는 그들의 논리는 걸음마조차 시키지 않으면서 아이가 걷기를 바라는 형편없는 자기모순이다.

벌써부터 그런 변설에 놀아난 논객들이 “그게 잘 될까?”하는 케케묵은 지레짐작을 펼치고 있다. 또 다시 `총론 찬성, 각론 반대`의 고약한 습성이 도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 차별적인 선입관을 깨는 일이 급선무다. 지역민들의 소원이면서 이 나라 민주화운동의 마지막 과업인 `지방분권형 개헌`의 열쇠를 작동시키기 위한 눈물겨운 사투(死鬪)를 시작할 때가 됐다.

국회의원들을 맨투맨으로 맡아서 설득하고, 감시하는 일부터 해야 한다. 그들이 `정계개편` 따위의 권력쟁탈전에 정신 팔려 역사적 숙제인 `지방분권형 개헌`을 등한시하거나 왜곡하는 일이 없도록 막아서야 한다. 저 높은 곳에서 사다리를 걷어차기 위해 버둥대는 기득권 중앙집권주의 의식의 발목도 묶어내야 한다. 지금보다 더한 호기(好期)는 없었다. 우리는 이 절박한 허들경기에서 결코 패배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