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생 양은 경사가 있는 산지, 울퉁불퉁한 바위언덕 등에 서식한다. 여름에는 고원지대로 올라가 휴식을 취하고 밤에 먹이를 찾아다닌다. 그런가하면 겨울에는 좁은 계곡에서 바람과 추위를 피한다. 이런 양은 좋은 시력을 가졌으며, 수영도 잘한다. 이 동물로부터 시작된 이야기는 우리나라의 토끼와 관련된 이야기만큼이나 많다. 우리는 희고 그리하여 순해 보이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한다.
▲ 야생 양은 경사가 있는 산지, 울퉁불퉁한 바위언덕 등에 서식한다. 여름에는 고원지대로 올라가 휴식을 취하고 밤에 먹이를 찾아다닌다. 그런가하면 겨울에는 좁은 계곡에서 바람과 추위를 피한다. 이런 양은 좋은 시력을 가졌으며, 수영도 잘한다. 이 동물로부터 시작된 이야기는 우리나라의 토끼와 관련된 이야기만큼이나 많다. 우리는 희고 그리하여 순해 보이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한다.

△우리는 어쩌다

한 남자가 있었다.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소비가 늘고, 기업의 투자가 늘어나고 외국투자가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남자가 늘린 것이 이 남자의 재산일 뿐이라는 것을, 프로크루스테스처럼 국민을 늘려 죽이려 한다는 것을 아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 남자는 경제를 꼭 살리겠다고 말했다. 우리 모두를 잘 살게 하겠다고 말했다. 선거법 위반, 주가조작 등 이 남자에 관한 나쁜 소문들이 돌았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를 지지했고 모두 과거일이라고, 큰일을 하다보면 그럴 수 있다고 말했다. 사람들의 바람대로 이 남자가 대통령이 되었다. 얼마 후 이 남자는 국가를 자신의 수익모델쯤으로 여겼다. 비리가 쏟아져 나왔다. 그렇게 비리들은 쏟아졌지만 법에 의한 합당한 처벌을 받은 것은 없었다. 법이 통하지 않았고, 상식도 통하지 않았다.

유시민은 한 팟캐스트에 이렇게 말했다. “당시 민심은 걸레인 줄 알아, 더러운 줄 알아, 그렇지만 저걸로 상 닦을 거야, 그 분위기였어요.” 우리는 이 남자가 생명체도 아닌 경제를, 그렇다고 죽지도 않은 경제를, 이 의인법과 활유법의 대가의 소생술을 보고 싶어 했다. 이 쇼를 위해 우리는 5년을 저당잡혔다. 우리는 단지 잘 살길 바랐다. 하지만 그러한 간절한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고, 경제는 더욱 어려워졌고, 다만 가계 부채가 늘어났다. 그랬던 우리는 또 어쨌던가! “다시 한 번 `잘 살아보세` 신화를 이룩하겠다”는, “중산층을 70%로 만들겠다”는, 말 아닌 말을, 말이 아닌지도 모르고 내뱉는 자로 갈아탔다. 환승 할인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같은 번호의 버스를 타고야 말았다.

이 남자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이 여자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경제를 살릴 수 있으리라는 환상 때문이다. 그러니까 물어야 한다. 우리는 어쩌다 우리 삶 속에서 중요하다고 여겨왔던 고매한 가치들을 경제 따위에게 가져다 바쳤던 것일까, 우리는 어쩌다 좋아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해서 일을 하게 된 것일까, 우리는 어쩌다 노동의 대가를 돈과 교환할 수 있다고 굳게 믿게 된 것일까, 우리는 어쩌다 돈이 삶의 가장 꼭대기에서 군림하도록 내버려 두었는가, 이런 것들을 말이다.

△시장경제 혹은 자본주의적 인식의 계보학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은 바로 우리가 어쩌다 경제를 삶의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게 되었는가를 추적한다. 그가 말하는 `거대한 전환`이란 이익 또는 시장경제가 펼쳐 놓은 유토피아적 비전을 맹신하게 된 그러한 전환점들이다.

폴라니는 먼저 `저질 인간으로 타락` 시키는 시장경제와 자본주의, 그러한 자본주의의 잘못된 관념을 갖게 된 이유를 추적해 간다. 그리하여 타운센드의 `논고`에 이르게 된다.`논고`는 전쟁을 일으키고, 전염병을 치료할 약을 만들지 말아야 하며, 굶어죽은 사람을 내버려두어야 한다는 이상한 이론을 펼친 멜서스, 임금의 상승이 이뤄지면 자본의 이윤이 줄어들고 다시 투자량이 감소하며 추가적인 생산이 멈추고 말 것이라며 임금기금설을 주장한 리카도, 그리고 구빈법의 폐지를 주장한 에드먼드 버크와 벤담, 최소한의 정부를 고집하며 자유방임주의를 말한 애덤 스미스 등이 공통으로 전제하고 있는 책이라고 폴라니는 말한다.

타운센드는 이 책에서 하나의 일화를 소개하고 있는데 그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칠레 연안 태평양의 로빈슨 크루소라는 무인도에 후안 페르난데스가 나중에 식량으로 쓰기 위해 몇 마리의 염소를 풀어놓았다. 그랬더니 염소의 수가 `바다의 모래알`만큼이나 늘어났다. 그러자 스페인 상선에서 노략질을 일삼던 해적단이 이 섬을 식량 창고로 삼았다. 당황한 스페인 정부는 여기에 암수 한 쌍의 개를 이 섬에 풀어 놓았다.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양쪽 생물 종 모두에게 가장 약한 것들이 제일 먼저 희생당했고, 가장 활동적이고 센 것들은 목숨을 보존했다.” 이 이야기에 살을 붙여 정식화한 자들이 소위 말하는 고전주의 경제학자들이다. 그들의 논리는 이렇다. 염소들은 개들이 쫓아오면 암벽으로 도망칠 수 있었고, 도망치다가 약한 염소는 개에게 잡혀 먹는다. 개와 염소 사이에는 미묘한 균형이 생기게 된 것이다. 그 균형은 정부가 만든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정부는 치안을 유지하는 규모로 작동해도 된다(애덤 스미스). 또한 약한 염소들에 대응되는 빈민들은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좋다. 그들은 약하지 않은 인간들에게 좋은 교훈이 될 수 있으니 말이다(맬서스).

타운센드는 짐승의 활동에서 인간의 삶의 조건을 유추해내고 있다. 인간 사회에서 정부를 어떻게 건설할 것인가라는 정치학의 근원적 물음들을 타운센드는 “인간 공동체를 아예 동물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함으로써 그 질문을 따돌려”버렸다. 폴라니는 바로 이 지점, 인간과 짐승을 동일한 선상에서 바라보고 있는 이러한 관점들에 대해 분개한다.

그는 인류학적 접근을 통해 자본주의가 인간을 정의하는 방식을 뒤집고 있다. “(인간이) 어떤 사물을 다른 것과 물물교환·교역·교환하고자 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또는 “인간은 물질적 재화의 소유라는 개인적 이해를 지켜내기 위해 행동”한다는 애덤 스미스식의 인간 정의를 폐기한다. 어떤 부족 사회도 개인만의 경제적 이해가 그 개인의 행동에서 으뜸가는 중요성을 가지는 일은 도무지 벌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부족 공동체는 구성원 중 특정인을 굶기지 않는다. 공동체 전제가 굶주리거나 위험에 직면하는 일이 있을지언정 특정 개인에 한해서 위험이 발생하지는 않는다.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생산과 분배는 상호성과 재분배의 원리에 의해 지켜진다.
 

▲ 공강일<br /><br />서울대 강사·국문학
▲ 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

△너무 늦었음

우리는 저마다 경제적 성공을 추구한다. 그 와중에 사람은 늘 배제된다. `아름다운 공주가 백마 탄 왕자를 만나 행복하게 살았다.`와 같은 이야기들을 보라. 지금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행복하게 살았다`에만 집중하고 있다. `누가` `어떻게` 행복해졌는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뿐더러 이미 정해져 있다. `부자`가 `돈을 더 많이 벌면` 행복해질 수 있다. 어떻게 돈을 벌 것인가와 같은 물음이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행복과 부의 양은 비례한다. 그러한 형식의 세상으로 재편되고 있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경제적 성공이 아니라 이 성공의 프레임을 폐기하는 일이다. 곧 자본주의적 소망을 철회하는 일이다. 칼 폴라니는, 시장경제는 사람의 영혼을 앗아가고 사람을 동물의 차원으로 강등시킨다고 말한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빠져 있는 것은 `사람`이다. 사람이 중심이 되는 사회에서 사람이 빠졌다니 그것은 더 이상 우리에게 아무런 놀라움도 주지 않는다. 충격체험이 삶의 유일한 조건이 되어버린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폴라니의 말처럼 사람들과 함께, 다 같이 살아갈 수 있는, 죽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 그러한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 문제는 이미 너무 늦었다는 것, 늦어도 너무 늦어버렸다는 것. 그러니 오히려 조급해할 필요 없지 않을까. 기왕 늦었으니 그렇다고 포기하자는 건 아니고 이제부터라도 천천히 시작하면 된다. 그렇게 시작하면 이 나빠진 세계에서 더 좋아질 일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늦었음은 기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