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병래<br /><br />시조시인·수필가
▲ 김병래 시조시인·수필가

도덕적, 법률적, 종교적 규범에 위반되는 모든 행위를 죄(罪)라고 한다. 죄에 대한 사전의 풀이다. 한마디로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되는 짓을 하는 것이 죄인 것이다. 그리고 마땅히 해야 할 짓을 하지 않는 것도 죄에 속한다.

그런데 `해서는 안 되는 짓`이나 `마땅히 해야 할 짓`에 대한 구분은 사회마다 다르고 시대를 따라 변해왔다. 시대와 지역에 따라 삶의 형태가 다르고 종교적 규범이 다르기 때문이었다.

인류에게 죄에 대한 개념이 생긴 것은 아마도 종교의 성립과 뿌리를 같이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인류가 사회를 형성할 때부터 종교적 규범이 곧 인간 삶의 질서체계였고, 그에 따라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이나 규정이 생겨났으리라는 추측이다.

중세를 지나도록 대부분 문명의 발달은 종교의 성장과 궤를 같이했다. 윤리적 사고의 발전도 종교적 교리를 떠나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종교적 규범이 곧 사회질서를 위한 규율이었고 삶의 의미나 지향성에 대한 가치이고 도리였다. 그에 따라서 죄의 개념이나 인식도 확고해져 갔다.

근대 이후 과학문명의 발달 등으로 종교의 권위와 세력이 약화되자 각 문명권의 윤리적 규범도 많이 인본주의적이고 보편화 되었다. 기독교나 이슬람은 여전히 신에 대한 숭배를 최상위의 윤리로 삼고 있고 불교에서는 모든 동물의 살생까지를 금하고 있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죄의 개념은 `사람이 사람에게 저지르는 잘못`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니 무인도에서 혼자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종교를 떠나서는 선악의 규범을 적용할 수가 없는 것이다.

죄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따른다는 것이 수천 년 동안 인류가 견지해온 가치관이다. 종교적인 계율을 어기는 사람은 종교적인 규제나 심판을 받을 것이고, 사회적인 규율을 어긴 범법자는 사회에 의한 제재를 받게 된다. 그리고 도덕적인 죄를 짓는 사람은 죄의식, 즉 양심의 가책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이다.

고대 사회에서는 자연재해나 질병 등의 인간으로서는 불가항력적인 위협에 대해서는 종교적인 해결책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종교적인 신념이 그런 재앙들을 직접 막아주는 것은 아닐지라도 불안과 공포로부터의 위안을 받을 수는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그런 종교적인 역할은 상당 부분 과학기술로 넘어갔다. 이제 웬만한 자연재해나 질병은 예측, 예방, 극복, 치료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과학기술이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어서 여전히 종교의 몫은 따로 남아있기도 하다.

21세기에 들어선 오늘, 인류는 죄에 대한 새로운 개념 정립을 할 수밖에 없다. 이제 인류에게 위협이 되는 것이 인간이 인간에게 직접으로 끼치는 해악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인류에게 가장 크고 확실하게 위협이 되는 것은 문명의 발달과 인구의 증가에 따른 각종 공해의 발생과 그로 인한 자연환경의 오염과 파괴다. 이대로 가다가는 머지않아서 인류는 물론 자연생태계까지 치명적인 위협에 놓이게 되리라는 전망이다. 지금에 와서 환경을 오염시키고 자연을 파괴하는 것보다 인류에게 더 큰 위협이 없으니, 그것이야말로 가장 큰 죄악이 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종교에서 신의 뜻을 거스르는 것을 죄라고 하듯이,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것이야말로 인류의 존속을 위협하는 이 시대의 가장 중대한 범죄인 것이다. 하루하루 먹고 입고 거처하는 일이 다 죄업이고, 집집마다 골목마다 넘쳐나는 생활쓰레기가 다 죄의 부산물이다. 인류가 구가해마지 않는 찬란한 문명의 성과들이 모조리 죄의 산물이고 문명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온갖 안락과 편리가 죄를 바탕으로 하지 않는 것이 없다. 공기와 물과 토양을 오염시켜 시시각각 인류의 생존환경인 생태계를 훼손하는 온갖 매연과 오폐수와 쓰레기, 이 죄를 다 어찌할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