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륜
▲ 소륜

△겹꽃 혹은 겹말

며칠 전 국화를 하나 들여놓았다. 꽃이 한창이어서인지 수국보다 더 많이 물을 먹는다. 하루만 나갔다 돌아와도 축 처진다.

국화는 꽃의 크기에 따라 대륜, 중륜, 소륜으로 나뉜다. 내가 들인 꽃은 소륜이다. 대륜보다야 덜 하지만 소륜 역시 꽃잎이 두세 겹으로 층지어져 있다. 이런 꽃을 겹꽃이라 부르는데 장미, 벚꽃, 동백, 백합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가을에는 꽃을 딴다. 그런데 `국화꽃을 딴다`라고는 하지만 `국화를 딴다`고는 하지 않는다. 국화(菊花)란 이미 국꽃(菊-)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국화꽃`이라고 쓰면 국꽃꽃이 되어 의미가 겹치게 된다. 이런 것을 겹말이라고 하는데 대표적으로 생일날, 모래사장, 술주정, 처가집, 면도칼, 축구공, 손수건 같은 것들이 있다. `생일`에 이미 `날`이 포함되어 있고, 모래사장에는 `모래`와 `사`가 반복되므로 `모래장`이나 `사장`으로만 불러야 한다.

국어학에서는 이러한 겹말을 의미의 잉여로 보고 있으며, 순화의 대상으로 본다. 즉 둘 중에 하나를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수건`과 `손수건`을 전혀 다른 것으로 알고 있다. 얼굴을 닦는 사람에게 손수건을 주지 않으며, 우는 사람에게 수건을 주지 않는다.

우리는 국화꽃을 따지 국화를 따지 않는다. 국화꽃은 겹꽃이며, 겹말이다. 꽃잎이 겹쳐 있으면서 동시에 언어도 겹쳐 있다. 이 겹쳐진 것은 결코 버리거나 삭제해야 할 어떤 것이 아니다. 이 무수히 많은 동일한 것들을 반복하면서 국화꽃은 삶과 죽음을 잇는다.
 

▲ 수레국화
▲ 수레국화

△국화와 죽음

죽음이 슬프다는 것은 고정관념일지도 모르겠다. 죽은 자가 다시 삶의 세계로 돌아올 수 없으므로 슬프다. 하지만 그 슬픔은 죽은 이의 것이 아니라 산 자만의 슬픔이다. 죽은 자는 죽었으므로 산 자의 슬픔을 다시 느낄 수 없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죽은 자는 다시 죽을 수 없다. 죽음은 유일하며 그런 점에서 죽음은 고귀하다. 이런 유일하고 고귀한 죽음을 완성하기 위해 인간은 노력해야한다. 죽음은 비록 인간에게 주어진 운명이지만, 그 죽음은 아무렇지도 않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치열한 삶 속에서 완성된다. 그런 점에서 죽음은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능동적이고 적극적이다.

하지만 완성되지 않은 죽음은 어떠한가? 원하지 않은 죽음들, 완성되지 않은 죽음들, 사소한 사고, 또 홀로코스트와 같은 처참한 죽음, 그리고 세월호……. 이러한 죽음은 어떻게 위로되는가? 대륜의 꽃잎 하나하나는 이러한 죽음에게 보내는 조사(弔辭)와도 같다. 대륜의 꽃잎은 위와 아래, 왼쪽과 오른쪽을 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안과 밖, 보이는 곳과 보이지 않는 곳, 차안과 피안을 향해 멀리까지 뻗어 있다. 아니 죽은 이들의 넋을 위무하며 동시에 그 불완전한 죽음을 완성하기 위해 꽃잎들은 뻗어가고 있다.

이제 다시 삶을 알겠다. 죽은 이가 다시 죽을 수 없듯이 산 자는 삶을 멈출 수 없다. 오직 쉼 없는 것만이 삶이다. 그러므로 삶의 연장선에 죽음이 있을 리 없다. 삶은 삶이고 죽음은 죽음이므로 죽음과 삶은 연속적일 수 없으며 죽음과 삶은 결코 만날 수 없다. 국화는 죽음 속에서 죽음을 완성시키며 삶 속에서 삶을 연속시킨다. 이 꽃들은 삶과 죽음에 취해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유일함에 취해 있고, 죽음의 고유함에 취해 있다. 국화에 취하는 일은 이와 같고 그 취함 속에서 삶과 죽음은 화해한다.
 

▲ 대륜
▲ 대륜

△국화: 피어, 나는

국화는 어떤 은근하고 은은한 힘 속에서 너울댄다. 이러한 일렁임은 환희라든지 열정이나 열망과 같은 강렬한 힘과는 거리가 멀다. 알을 깨고 나오는 것들이 그러하듯이 피어나는 일은 스스로 서서히 벌어지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피어남`은 주체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행위도 그렇다고 수동적이거나 소극적인 행위도 아니다.

국화의 꽃잎 하나하나는 주체적이지도 그렇다고 비주체적이라고 할 수 없는 어떤 힘들에 쌓여 있다. 미약하고 소박하지만 멈추지 않는 끈기를 가진 어떤 힘들에 취한 듯 나비는 날아든다. 이러한 힘을 우리는 `자연(自然)`이라고 부른다. 그저 그렇게 될 뿐이나 그렇게 되는 것을 거부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그렇게 되어지는 것도 아닌, 없는 듯 있고, 있는 듯 없는, 그러한 오묘하고 오롯한 힘. 이 힘들 속에서 국화는 피고 나비는 날고 가을은 짙어진다. `피고`, `나는`, 그리하여 `피어나는` 것들의 개별성과 고유성 속으로 시간은 흐른다.

△유연(悠然)

結廬在人境(결려재인경): 속세에 오두막을 짓고 살아도

而無馬喧(이무거마훤): 수레와 말 왔다갔다 하는 시끄러운 소리 하나 없구나

問君何能爾(문군하능이): 그대에게 묻노니 어찌하면 그럴 수 있는가

心遠地自偏(심원지자편): 마음이 세속에서 멀어지니 꼭 외딴 곳에 사는 것만 같노라

採菊東籬下(채국동리하): 동쪽 울타리 아래에서 국화를 따며

悠然見南山(유연견남산): 문뜩 남산을 바라본다

山氣日夕佳(산기일석가): 산의 자태는 석양 빛 속에 아름답기 그지없고

飛鳥相與還(비조상여환): 날아다니는 새들도 서로 함께 둥지로 돌아가네

此中有眞意(차중유진의): 이러한 모습 속에 삶의 진정한 의미가 있는데

欲辨已忘言(욕변이망언): 그것을 표현하려 해도 할 말을 잊어 어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도연명 `음주(飮酒) 제5수`

밖에 나와 국화를 땄겠지. 술을 담든, 차를 끓이든, 여튼 그러할 요량으로 국화를 땄겠지.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었겠지. 그랬더니 석양이 물드는데 새들은 비끼어 날아 숲으로 깃들어갔겠지. 이런 순간들 속에서 “진의(眞意, 진짜 의미)”를 느꼈다니? 도연명은 표현하려 해도 할 말을 잊었다고 했지만, 이건 능청에 지나지 않지. 이미 그는 말을 다해버렸으니까.

그렇다면 도연명이 느낀 `삶의 진짜 의미`는 뭘까? `진의`가 어떤 시구를 받느냐에 따라 그것은 다르게 해석 될 수 있지. 바로 위의 두 구절, “山氣日夕佳 / 飛鳥相與還”(산의 자태는 석양 빛 속에 아름답기 그지없고, 날아다니는 새들도 서로 함께 둥지로 돌아가네)을 받는다고 할 수도 있겠지. 그렇게 되면 새를 사람으로, 석양을 말년의 삶으로, 둥지를 죽음으로 치환할 수 있겠지. 삶의 진리란 결국 늙으면 죽는다는 것. 삶의 `진의`란 대단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런 단순하고 극명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

▲ 공강일<br /><br />서울대 강사·국문학
▲ 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

한편 `진의`는 그보다는 그런 풍경을 바라볼 수 있게 만든 저 `유연(悠然)`에 걸려야 하는 것이 아닐까? 비록 이것을 `문득`이라고 옮기긴 했지만, 이걸로는 충분하지 않지. `유연`히 남산을 보았다는 건, 놔두는 대로 두어도 그러려고 그랬다는 듯이 산을 바라보게 되었다는 뜻이지. 풍경이 `나`를 불러 세운 것도, 그렇다고 `나`가 그렇게 하려는 마음을 먹은 것도 아닌 상태, 온전히 우연도 아니고 온전히 의도를 가진 것도 아닌 상태, 풍경과 내가 맞닥뜨렸다고 해야 할까, 바로 그런 상태에서 남산을 본 게지. 그랬더니 석양이 지고, 새가 날더라는 것. 고개를 들지 않았으면 놓쳤을 바로 그 순간의 `남산`.

아쉬움이란 늘 사후적이어서 사건이 일어나고 나서야 발생하는 감정이지. `나`가 고개를 들어 바라본 `남산`에는 어떤 특별한 사건도 없었지. 그러니 고개를 들지 않았다고 해서 후회고 자시고 할 건덕지 같은 건 없지. 그럼에도 고개를 들어 그 풍경을 보았다는 것, 그리고 그 풍경이 `나`의 가슴에 와 박혔다는 것. 남산, 석양, 새와 나의 조우! 그리고 그러한 조우를 만들어내는 힘, 유연! 삶의 진정한 의미는 그러한 유연함 속에 깃들어 있겠지. 결국은 설명할 수도, 표현할 수도 없고, 그저 감탄하게만 만드는 그러한 힘, 그 힘을 느낄 수 있지만 사실은 텅 비어 있는 어떤 힘. 거기에 `진의`는 깃들어 있겠지. 그러니 `진의`는 우리가 의식할 수 없는 순간, 우리가 눈여겨보지 않는 그 순간 우리를 스쳐지나가겠지. 그러니 진리는 오직 휙 스쳐가는 상으로만 존재하고, 그 상을 부여잡는 사람은 오직 시인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