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순희수필가
찻집 창문으로 내다뵈는 능선이 곱다. 어느 왕이 누운 자리인지 알기 힘드니 능이 아니라 총이라고 해야 하나. 멀리 경주남산을 배경으로 한 도시의 풍경은 고개를 돌리는 어디에나 공룡알 같은 능이 엎드려있다.

경주나들이를 할 때면 옆지기가 역사전공이라 늘 가이드와 함께하는 셈이다. 오늘은 무엇을 보여줄까 궁금해 하자 `나를 따르라`며 능을 보호하는 둘레돌의 변천사를 공부하자고 했다. 도착한 곳은 석탈해왕릉 주차장이다. 포항에서 출발해 경주에 들어서는 길가에 있어서 첫코스로 선택한 듯하다.

신라 제 4대 탈해능에는 둘레돌이 보이지 않는다. 소나무들만이 능을 향해 허리를 구부린 채 빙 둘러서있다. 능을 만들기 시작한 초기라서 아직은 호석의 필요성을 깨닫지 못했나? 학생시절 배운 국사책에 써져 있던 역사조차도 다 기억하지 못하는 낙제생인지라 궁금한 것 투성이다.

부족한 학생에게 남편은 호석의 모든 것을 보여주겠다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다. 두 번째로 향한 곳은 우리에게 첨성대를 비롯한 많은 유산을 남겨준 27대 선덕여왕릉이다. 석탈해능에서 차를 타고 10분이 안 되는 거리에 있다.

산중턱에 위치한 능까지 오르는 오솔길에 소나무가 만드는 풍경이 사람을 압도한다. 겨우살이 준비하는 청설모가 나무를 오르내리다 가을바람결에 땀을 식힌다. 오랜 시간 사람들의 발길로 다져놓았지만 비가 내리면 그곳이 물길로 변한다. 거센 빗물에 흙이 쓸려갔는지 뿌리가 다 드러난 것이 마치 고향집을 지키는 늙은 어미의 손등 같다. 되도록 밟지 않으려 애쓰며 발을 옮겼다.

길 끝에 놓인 돌계단을 올라 둥긋한 능을 보며 가쁜 숨을 고른다. 애써 쌓아놓은 능의 흙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다듬어지지 않은 자연석을 끼워 맞춰 능 주변에 둘러놓았다. 크기도 고르지 않고 돌의 종류도 각각이다. 소박하게 두 단으로 천년 넘는 시간을 버텨준 돌과 눈을 맞추며 둘레를 한 바퀴 돌아본다.

산을 내려오다 보면 건너다보일 거리에 31대 신문왕릉이 있다. `뉴스페이퍼킹`이라며 아재개그를 무심히 던지는 남편가이드의 말에 울퉁불퉁한 돌을 신문지처럼 네모반듯하게 깎아서 호석을 둘러놓았으니 썰렁한 농담도 인정해주기로 한다.

다섯 단으로 더 올라간 높이, 같은 종류의 돌을 같은 모양으로 다듬었고 단 위에는 얇고 넓적한 돌로 흙을 떠받혀서 마무리를 했다. 그래서 엄밀히 말하면 여섯 단이라고 해야 하나. 그도 모자랄까 싶은지 둘레를 일정한 간격으로 직각삼각형의 돌로 받혀 놨다. 떡하니 버티고 있다고 해야 한다. 27대에서 31대까지의 세월이 이런 기술을 만들었구나싶어 호석 사이사이의 받침석에 핀 돌꽃을 손으로 한번 어루만져주었다.

십여 분 더 울산방향으로 차를 달려 이제 호석의 끝판왕을 만나러 가자. 괘릉이란 별명의 원성왕릉은 능 둘레에 넓은 판을 붙여 12지신상을 새겨 넣었다. 그 걸로 모자라 무인석과 문인석을 입구에 배치해서 구성미를 더했다. 사자 두 마리도 양 옆을 차지해서 능을 지키고 있으니 38대로 내려오는 동안 기능과 멋 모두 완성단계에 이르렀다. 아랍인을 닮았다는 무인석 옆에서 눈을 들어 먼 산을 바라보았다. 능선이 서라벌을 감싸 안고 가로누웠다. 이제는 느긋하게 쉬어가라고 나를 타이르는 듯하다.

처음 호석이 나타난 27대까지 600년이 넘는 세월이 걸렸지만 31대왕까지 50년 만에 다듬어지고 단단해졌다. 38대 괘릉까지 호석이 발달한 몇 백 년의 시간을 한나절 만에 보려고 경주에서 울산가는 도로를 따라 길가에 위치한 능을 중심으로 일정을 잡았다. 우왕좌왕 하지 않고 한 길로만 달려가면 되니 이런 나들이도 꽤 괜찮은 것 같다.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능은 서라벌이 아닌 경기도에 있다. 나라를 지키지 못했기에 고향에 누울 수 없었다. 재미난 역사지식을 알려 준 남편에게 신라시대 왕들도 마셨을 법한 차 한 잔 사주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두런거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