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 편의 그림은 한국의 로트렉이라 불리는 구본웅의 `여인`(왼쪽)과 `우인상`(오른쪽)이다. 로트렉이 물랑루즈의 상업 포스터를 그리며 생계를 유지했고 변두리로 밀려났던 매춘 여성들을 그리며 동질감을 느낀 듯하다. 구본웅도 로트렉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구본웅과 이상이 함께 거리에 나서면 친구들은 폐병쟁이와 곱추 `병신 둘`이 거리에 나왔다고 짓궂게 놀렸다고 한다. 멀쩡하지 않은 나라에서 멀쩡하지 않는 몸으로 산다는 것은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들에게 요절(夭折)은 일종의 권리가 아니었을까?
▲ 두 편의 그림은 한국의 로트렉이라 불리는 구본웅의 `여인`(왼쪽)과 `우인상`(오른쪽)이다. 로트렉이 물랑루즈의 상업 포스터를 그리며 생계를 유지했고 변두리로 밀려났던 매춘 여성들을 그리며 동질감을 느낀 듯하다. 구본웅도 로트렉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구본웅과 이상이 함께 거리에 나서면 친구들은 폐병쟁이와 곱추 `병신 둘`이 거리에 나왔다고 짓궂게 놀렸다고 한다. 멀쩡하지 않은 나라에서 멀쩡하지 않는 몸으로 산다는 것은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들에게 요절(夭折)은 일종의 권리가 아니었을까?

△한국의 누드화

한국의 누드화는 1910년대를 전후로 그려졌다. 한국의 전통문학에서는 생소했던 누드는 조선시대의 유교사상에 젖어 있던 당시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누드화는 신문에 작품이 소개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조선경무국이 “이해 없는 일반의 부도덕한 흥분을 촉발할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신문에 누드화 사진을 실을 수 없게 조치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된 에피소드가 있다.

김관호는 1916년 동경미술학교의 졸업 작품으로 전라의 두 여인이 해지는 강가를 향해 뒤돌아서 있는 모습을 그렸고 제목을 `석모(夕暮)`라 붙였다. 이 작품은 제10회 `문부성미술전람회`(`문전`)에서 특선을 받게 되었다. 조선에서도 아니고 일본, 그것도 정부가 주도하는 미술전람회에서 입성하였으니 당시 신문에 대서특필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벌거벗은 그림인고로” 사진으로 게재되지는 못했다.

이러한 관행은 광복이후에도 이어졌다. 1949년 경복궁에서 열린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 입선된 김흥수(1919~)의`나부군상`은 여러 개의 나체 스케치를 조합한 그림이다. 하지만, 당국은 화가가 여러 명의 여인을 한 장소에서 벌거벗겨 놓고 그렸다는 이유로 풍기문란을 적용하여 작품을 전시할 수 없게 하였다. 이 그림은 화가가 근무하는 학교에 걸어두었는데 한국전쟁 때 유엔군 병사들이 조각 내놓았다는 풍문이 전해지기도 한다.

어찌 되었던 누드화는 계속 그려졌다. 1928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여겨지는 나혜석의 `나부`, 1936년 `문전 감사전`에 입선 한 후 1937년 `선전`에 재출품하여 `창덕궁 상`을 수상한 김인승의 `나부`, 1936년 제16회 `협전`에 출품한 임군홍의 `나부와상`, 서진달의 `왼손에 입을 댄 나부`(1937) 등이 있다. 그 외에 누드화라 할 수 없으나 이인성의 `가을 어느 날`(1934)은 상반신을 드러낸 여인을 볼 수 있다.

△구본웅과 이상

이러한 누드화 중 주목을 끈 작품은 1935년 전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구본웅의 `여인`이다. 그 전에 구본웅에 대해 알아두는 것이 좋겠다. 구본웅은 1906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2살 무렵 입은 척추 장애를 앓았다. 이런 구본웅의 모습 때문에 조선의 로트렉으로 불렸다. 구본웅은 경신고등학교에서 미술을 배웠고 김복진 밑에서 조소를 배웠으며, 1927년 제6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차지하였다. 이후 일본에서 수학하다 1933년 다이헤이요(太平洋)를 졸업하여 귀국하여 창작과 비평활동을 겸하였다. 또 `청색지`를 창간하여 이상, 이육사 등의 작품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이상과 구본웅이 친해진 것은 아마 그가 구자혁의 아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구자혁은 기독교 출판사인 창문사를 인수하여 다양한 책들을 발간하였다. 이상은 이 출판사에서 편집이나 인쇄를 의뢰하면서 창문사를 알게 되었고, 또 창문사는 이상의 능력을 알아보고 표지나 삽화를 청탁하면서 관계를 이어갔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구본웅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물론 구본웅을 먼저 알게 되면서 창문사와 관계를 맺었을 수도 있다. 정확한 것은 아직 알려져 있지 않다.

분명한 것은 이상과 구본웅은 친했다는 것이다. 구본웅은 이상을 위해 1935년경에 `우인상`을 그려주었다. 권영민 교수는 이상은 구본웅을 위해 `차8씨의 일일`이라는 시를 써 주었다고 한다.

△ 구본웅의 `여인`

어찌되었든 구본웅과 이상은 친했고, 구본웅도 그림을 잘 그렸고 이상도 그림을 잘 그렸다. 구본웅의 `여인`은 당대에 그려진 다른 누드화와는 다른 점이 있다. 당대의 누드화와 달리 머리 뒤로 손을 넘겨 깍지를 낀 듯한 모습은 강렬하면서 도발적이다. 김현숙은 이 작품과 유사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사토미 가쯔조(1895~1981)의 `女`와 비교하고 있다. “어깨와 목을 삼각형으로 연결시킨 표현”에서 두 작품은 유사하지만, 사토미의 윤곽선이 “형태의 윤곽을 한계 짓는 소극적 기능에 머무른다면 구본웅의 경우는 선의 강약과 속도감이 화면”을 지배한다고 본다. 강렬한 색채, 그리고 분방한 필치의 굵은 선은 작가의 체취를 유감없이 표현해 내고 있으며, 이러한 인체 표현은 이전의 전통과 다르다. 자, 그럼 이제 작품을 감상해볼까.

그녀의 얼굴은 왼쪽 위를 향하고 있는데, 이것은 매우 의도적으로 보인다. 유난히 두드러진 왼쪽 광대뼈, 그 위로 강렬한 빛이 쏟아진다. 그 빛이 너무도 강렬하여 얼핏 보면 얼굴의 왼쪽 면이 그림의 중심처럼 느껴질 정도다. 그러나 도발적으로 치켜뜬 찢어진 왼쪽 눈초리, 그것은 굵고 강해보이는 머리칼 부근에서 초점을 잡지 못하고 흩어져 버린다.

왼쪽 눈은 그런 식으로 물러나고, 오른쪽 얼굴이 강렬하게 부각된다. 왼쪽눈이 빛을 향해 도발적인 태도를 보인다면 오른쪽눈은 그 빛을 피하는 듯, 한 발짝 비켜서 있다. 지그시 감은 눈과 그 위에 내려앉은 옅은 명암은 부끄러움을 피하고 있는 듯 수줍지만, 눈동자를 가리는 두터운 눈꺼풀이 만들어내는 곡선은 우울하면서도 관능적이다.

 

▲ 공강일<br /><br />서울대 강사·국문학
▲ 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

이 눈과 눈을 갈라놓는 코는 또 어떤가. 얼굴에 비해 큰 듯도 하지만, 정작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코가 만드는 그늘인데, 왼쪽에도 오른쪽에도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이제 빛이 왼쪽에서만 들어온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그녀의 정해지지 않은 눈빛과 표정, 그리고 코가 만드는 명암, 얼굴을 바치고 있는 가는 목, 그의 왼쪽에서 오른쪽 뒤로 돌아드는 승모근,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해 있는 가슴, 얼굴의 좌측에서 우측으로 다시 목과 어깨를 지나 가슴으로 시선을 이동하도록 만들고 있다.

이것은 다분히 의도적이라 할 수 있는데 구본웅은 이를 통해 정지된 화면 속에 이 여성의 역동적 움직임을 보이려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 여성은 화가를 향해 포즈를 취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몸을 전후좌우로 흔들며 그녀의 강렬한 생명력을 발산하고 있다.

이 그림의 강렬한 역동성, 이 일렁임을 부각시키는 중요한 요소는 그녀를 휘감는 검고 굵으면서도 거친 외곽선이다. 가슴의 선은 그녀의 강한 기운을 감당하지 못하고 터질 듯 팽창해 있으며, 잠깐 이완된 왼팔 상박을 지나는 선은 수축할 것을 대비하여 잔뜩 긴장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이 그림은 찰나가 아니라 찰나들을 차곡차곡 포개어 놓은 듯한 느낌이다. 이것이 이 그림의 역동성과 생명력의 비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