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재휘 논설위원
▲ 안재휘 논설위원

“세상에서 정력이 가장 센 사람은 누구일까요?” 김영삼(YS) 정부 초기에 유행했던 난센스 퀴즈다. 김영삼 대통령은 “임기 내내 사정(査正)을 지속하겠다”고 선언했다. 공직자 재산공개, 하나회 해체와 정치군부 숙정, 역사바로세우기, 1995년 지방자치제 확대 실시, 금융실명제 등 YS는 숨 쉴 겨를이 없도록 개혁드라이브를 몰아쳤다. 임기 말 IMF외환위기 초래로 빛이 바래긴 했지만 YS정부의 개혁 의지는 대단했다.

세상이 온통 어수선하다. 들려오는 소음만으로 판단하면, 머지않아 참혹한 전란(戰亂)이 일어날 가능성조차 있다. 나라 밖에서는 한반도 하늘에 시커먼 전운이 끼어 있다는데, 희한하게도 정작 당사자인 우리는 무신경하다. 무슨 까닭인지 정치권조차 아무런 긴장감이 없다. 집권 정부여당은 탄핵으로 옥에 갇힌 전 대통령을 넘어 이명박 전전 대통령까지 옭아 넣으려고 혈안이 된 모습이다.

칼자루를 잃은 보수야권은 전전긍긍이다. 정작 국민들이 바라고 또 바라는 `보수혁신`은 얼개조차 못 내놓고 있다. 집권세력의 전방위적인 압박전술에 지리멸렬 군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적폐청산`이라는 신무기에 장착된 억하심정은 상상을 뛰어넘는 수준으로 읽힌다. 정말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아직 우리는 `보복정치` 관성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돌이켜보면 역대 정권들이 정도의 차이만 있었을 뿐 다들 그랬다. `개혁`이나 `혁신`이라는 말을 약방의 감초처럼 사용하지 않은 정권이 없었다. 물론 그런 설거지들이 형편없던 우리 사회의 수준을 일정부분 끌어올린 것은 사실이다. 민주주의를 키워온 다른 나라들에 비춰보아도 결코 뒤처지지 않을 만큼 단기간에 고쳐낸 구태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우리 정치가 여태 못 잘라낸 지독한 고질병 `패거리기질` 때문에 일어나는 퇴행적 소란은 통탄스럽다. 정치인들은 모든 사건을 오직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의 틀 속에 우겨넣고 떠들어댄다. 집권세력은 민심에 불을 지를 슬로건 하나를 내걸고 줄기차게 몰아친다. 그리고 그 폭포 속으로 정적들을 두름두름 몰아넣을 궁리에 몰두한다.

문재인정부의 `적폐청산` 타깃이 실체를 드러내면서 거친 `정치보복` 논란이 시작됐다. 여권 세력의 일사불란한 칼질에 보수정치권은 고작 독설로 맞서고 있는 형국이다. 추석명절이 지나면 `적폐청산`에 대한 민심이 갈래를 잡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돈다. 명절기간 특별한 소통이 이뤄지면서 모종의 변곡점이 형성될 거라는 분석인 것이다.

정치인들은 어김없이 서울역으로, 고속버스터미널로 사진을 찍으러 달려가고 있다. 추석이 지나면 각자 듣고 온 민심들을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릴 것이다. 그런데, 단 한 번도 정치인들이 전하는 명절민심이 신실해 보인 기억은 없다. 하나같이 아전인수(我田引水)의 벽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늘 듣고 싶은 말만 듣고 와서는 하고 싶은 말만 읊조린다.

이번 추석명절에는 국민들이 제발 정치인들의 유치한 선동에 휘둘리지 말기를 희원한다. 북한의 핵폭탄이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절체절명의 안보위기 앞에서 주야장천 냄새나는 쓰레기통이나 엎어놓고 상대패거리 개망신시킬 꼼수나 주물럭거리고 있는 게 말이 되느냐고 꾸짖어야 한다. 참회하고 거듭나라 그렇게 혼쭐을 냈건만 도무지 요지부동인 정치인들에게는 “제발 정신 좀 차리라”고 도리깨를 휘둘러야 한다.

명절이 끝나고 여의도에 모여든 정치인들이 국민통합과 번영을 위한 가슴 뛰는 새로운 설계도를 펼쳐 보이기를 소망한다. 부디 전쟁의 참변이 두려워 라면박스부터 사재야하나 어째야 하나 고민하는 민생들을 안심시킬 강력한 국가안보 묘책부터 생산해내주기를 희망한다. 제도와 관행 개선에 초점을 맞춘 YS의 개혁은 무엇보다도 명분에 허점이 적었던 까닭에 긍정적 평가를 남기고 있음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