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종<br /><br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1991년 9월 21일, 추석 전날 일이다. 베를린 자유대학 유학생이었던 나는 영화출연 제의를 받는다. `모든 게 사기(Alles Luege)`라는 제목의 희극영화 단역에 나가보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다. 주지하는 것처럼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채 1년도 지나지 않은 1990년 10월 3일, 도이칠란트는 재통일된다. 그 이후에 유럽에 몰아닥친 극우 민족주의와 파쇼의 광기는 위험천만한 것이었고, 영화는 그런 분위기에서 제작됐다.

희곡과 연극을 공부하던 나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촬영장소가 구(舊) 동도이칠란트의 국회의사당 격인 인민궁전이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출연료도 적잖게 배정돼 있어서 맞춤한 아르바이트였다. 온밤 내내 비가 내리는 속에서 촬영이 진행됐다. 나와 몇몇 한국인 유학생은 중국인으로 출연했고, 중동에서 온 친구들은 쿠바의 카스트로를 모방한 멋들어진 수염을 달고 있었다.

명민한 독자는 알아채셨겠지만, 사회주의 국가 가운데 경제적인 면에서 정상의 지위를 점했던 동도이칠란트의 허위와 허세를 비웃는 것이 `모든 게 사기`의 내용이었다. 한국 유학생 하나가 “아인 운트 츠반치히 운트 아인 할베스 프로젠트?!” 하는 대사를 맡았다. “21.5퍼센트?!” 하는 도이치어다. 주연배우가 자꾸만 실수하고 대사를 잊어버리는 바람에 촬영은 예정시간을 훌쩍 넘겨 아침나절이 돼서야 끝났다.

영화사 측은 애초 예정된 급료만 지급하려 해서 우리는 연합시위에 돌입했다. 일을 시켰으면 시킨 만큼 추가비용을 지급하라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었다. 요구가 관철되어 추가수당을 더 지급받고 우리는 인민궁전을 빠져나왔다. 동베를린에는 아침햇살이 환하게 내리비치고 있었다. 간밤에 언제 비가 왔었느냐, 하는 새삼스런 눈길로 나를 비추던 찬란한 햇살이 지금도 기억에 삼삼하다. 그때 내겐 동행(同行)이 있었다.

정치학을 공부하던 81학번 친구였는데, 그와 함께 서베를린 동물원역 부근에 있는 카페에 들어갔다. “한형, 앞으로 좌파 운운하는 인간들 있으면 그냥 놔두지 않을 거요!” 함부로 좌우를 이야기하고, 편을 가르는 행위가 얼마나 무의미하고 허망한 것인지를 깨우친 밤샘이 나를 그렇게 인도한 것이다. 반쯤 빨개진 눈과 몽둥이로 얻어맞은 듯 욱신거리는 육신과 영혼이 나를 거칠게 몰아붙이는 우울한 추석아침이었다.

추석 무렵이 되면 그날의 일을 추억한다. 민족의 명절로 일컬어지면서 한민족 대이동을 세계만방에 떨치도록 하는 추석. 하지만 내게 추석은 2차 대전의 추축국 도이칠란트가 분단을 넘어 통일로 접어든 시기로 다가온다. 하필이면 그들은 `개천절`에 다시 뭉친 게 아닌가. 우연치고는 아주 고약한 우연이라고 생각한다. 전쟁과 무관했던 나라는 여전히 분단의 고통에 시달리는데, 전쟁주역 국가는 히죽 웃고 있는.

1991년 겨울 훔볼트 대학에서 있은 지도교수 강연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시상(詩想)이 떠올랐다. 약속도 미뤄놓고 `1991년 겨울 베를린`이라는 우울한 단시를 썼다. 거기서 나는 히틀러의 제3제국과 다시 시작되는 제4제국의 불길한 예감을 가감 없이 표출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동상 앞에 내던져진 시대의 야유 “우리는 아무 잘못도 없어요! (Wir haben keine Schuld!)”를 기록했다. 그리하여 무너진 역사와 시작하는 역사를 생각했다.

한 세대가 지난 오늘의 시점에서 그날을 돌이키자니 가슴이 먹먹하다. 짧지 않은 시간대에 우리는 무엇을 하고 살아온 것일까. 스스로 돌아보아도 쓸쓸함과 우수와 한숨만 허옇게 색 바랜 머리털과 벗할 뿐. 한반도에 전쟁의 암운이 감돌고, 미국과 북한은 야수처럼 으르렁거리는데, 초로에 접어든 사내는 한낱 범부(凡夫)에 지나지 않는다는 자책. 제 몸 하나 온전히 추스르지 못하고 이리저리 떠도는 부나방 같은! 하되, 달 밝은 추석명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