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우린 모두 동일한 병을 앓고 있다. 그 병은 결국 우리를 죽음에 이르도록 만들 것이다. 그래서 그 병의 이름도 `죽음`이다. 우리는 누구나 `죽음`이라는 불치병을 앓고 있으며 누구나 시한부로 살아간다. 그러하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이 병과 함께 살아가는 일이며, 같은 병을 앓고 있다는 동질감 속에서 서로를 사랑하며 살아가는 일밖에 없지 않을까?
▲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우린 모두 동일한 병을 앓고 있다. 그 병은 결국 우리를 죽음에 이르도록 만들 것이다. 그래서 그 병의 이름도 `죽음`이다. 우리는 누구나 `죽음`이라는 불치병을 앓고 있으며 누구나 시한부로 살아간다. 그러하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이 병과 함께 살아가는 일이며, 같은 병을 앓고 있다는 동질감 속에서 서로를 사랑하며 살아가는 일밖에 없지 않을까?

△에로틱한 사랑

나: 사랑하면 뭐가 먼저 떠오르세요?

당신: 라다크에서는 일처다부제래요. 다부제라고 하지만 무한정 남편을 둘 수 있다는 얘기는 아니고, 대개 두 명의 남자와 같이 산대요. 이곳 사람들은 사랑 따윈 하지 않는대요. 왜냐면 사랑은 독점적인 거니까! `에로스의 종말`(한병철)에서 사랑은 `절대적 타자성의 경험`이라고 말하지만, 정말 타자의 타자성을 알게 된다는 것 그것 자체가 독점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돼요.

다시 라다크로 돌아가자면 일처다부제인 이곳 사람들은 한 집에서 여자와 남자 둘이 함께 살아요. 때론 셋이서 함께 자기도 한다더군요. 모르겠어요, 저는 에로스하면 왠지 철학적인 것보다 에로틱한 것이 떠올라요. 정말 에로스에 대해 말해야 한다면 바로 이런 살과 살의 직접적 접촉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돼요.

나: 그런데 육체적 사랑은 금방 식어버리지 않나요?

당신: 물론 그렇긴 하죠. 그래서 사랑은 결국 얼마나 참을 수 있는가의 문제가 아닐까요? 여기 계신 분들도 다들 불같은 사랑을 해보셨거나 하고 계실 것 같은데…. 물론 저도 그런 사랑을 해봤어요. 정말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 제 몸의 솜털 하나하나까지도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 그 사람이 하는 모든 일들에 대해서 저는 특별히 노력하지 않아도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그 사람이 늦거나 약속을 바꾸어도 모두 이해할 수 있었어요. 제 모든 감각이 그 사람을 향해 쏠려 있으니까요. 음, 무의식적 사려 깊음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상태가 되는 거죠. 그 사람이 제게 당신 같은 사람을 만났으니 나도 당신처럼 착해져야 할 것 같고, 나도 당신처럼 착해지고 싶다고, 이 세계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당신을 위해서, 와 같은 오글거리는 말을 들었을 때, 정말 좋았어요.

아시겠지만, `이 또한 지나가리니` 그런 시간은 지나가고 말아요.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고운 모래처럼 그렇게 흘러내리고 말아요.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조금씩 싸우게 되죠. 이 싸움을 견뎌낼 것인지 말 것인지, 이 싸움을 견뎌낼 가치가 있는지. 여기서부터는 낭만이나 감성이 아니라 이성이 지배하는 시기가 오죠. 그것을 참아낸 후, 그렇게 해서 그 사람을 새롭게 다시 사랑하게 되었을 때 이제 진정한 사랑이 시작되는 거죠.

△인류애

나: 이런 이성간의 사랑도 좋지만 조금 더 보편적인 사랑에 대해서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당신: 최근에 `페스트`라는 책을 읽었어요. 잘 생각은 안 나는데 더듬어 보자면 이런 장면이 있어요. 리외가 페스트 속에서 페스트와 열심히 싸워요. 그렇지만 그가 하는 일이란 페스트 환자라는 것을 진단하고, 그 다음 격리시설로 옮기고, 그러면 남은 가족은 울며 리외에게 제발 집에서 치료받게 해달라고 말하죠. 당연히 리외는 그 말을 듣지 않고, 그러면 남은 가족들은 이렇게 말하죠. 당신은 참 인정이 없군요. 그 말을 듣자 흥분한 서술자가 튀어나와 천만에 그는 인정이 넘치는 사람이야, 라고 큰 소리로 말해요.

그 목소리가 어찌나 크게 들리던지 깜짝 놀랄 정도였어요. 그래서 리외의 `인정`을 반강제적으로 인정하게 되었어요. 반강제적이라고 말했지만, 완전히 동의하게 되었어요. 리외는 사람들에게 `인정`을 베푼 것이 아니라 정말 사람을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리외 같은 사람요, 페스트 환자를 발견하고 명명하고 그리고 그 죽음까지 지켜볼 수 있는 사람, 그 참혹한 일련의 과정을 모두 수행해 갈 수 있다는 것, 그건 인정이나 배려 같은 것이기도 하겠지만, 그것의 정확한 이름이 `사랑`인 것 같아요.

몇 년 전이더라, 한 5~6년 되었던가요? 그 공지영 소설가의 소설을 영화한 `도가니`가 개봉했을 때 억지로 보러 갔던 적이 있어요. 내용을 들어서 알고 있었는데 그걸 영화로 보아야 한다는 것, 그 사건에 저 역시 목격자로 참여하여 저열한 인간들과 그 저열함에 속수무책인 아이들을 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 영화관이 CGV였는데 맥주를 팔더라구요. 그래서 그걸 마시면서야 겨우 영화를 볼 수 있었어요. 너무 처참한 것에는 눈을 돌리기 쉬워요. 그런데 리외는 어떻게 그것을 견딜 수 있었을까요. 정말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참을 수 없는 것까지 참아내는 일이 가능할까요? 그래서 전 사랑에 관해서라면 `페스트`를 추천하고 싶어요.

▲ 공강일<br /><br />서울대 강사·국문학
▲ 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

△혐오 문제

나: 조금 다른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랑은 둘이서 하는 것이니까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랑은 주로 이성간의 사랑이니까, 여성과 남성의 문제에 대해서 말하지 않을 수 없군요. 여혐이나 남혐과 같은 혐오문제가 파괴본능을 부추기고 있는 것 같아요. 여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당신: 질문의 취지에 빗겨가는 것 같지만, 사회자께서 여혐이나 남혐이 파괴본능으로 나아간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의 취지를 충분히 공감해요. 하지만 어떤 발언이나 행위에 여혐이나 남혐을 붙일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작년 쯤 많은 페친을 몰고 다니는 남성 시인이 여혐 논란에 휩싸였어요. 누군지 아실지 모르지만, 저는 그 시인을 공격하기 위해서 이 말을 하는 건 아니라는 걸 분명히 해둘게요. 한 기사를 계기로 말이죠. (지금부터 `그 시인`을 R이라고 부를게요.) R은 자신은 여성혐오자가 아니며 이런 악의적 기사는 언론이 문인을 길들이는 방식이다, 라고 대응했어요. R을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 역시 `R의 말이나 글이 여혐이면 우리는 아무 말도 안하고 살아야 한다.`와 같은 반응을 보였어요. 비슷한 일은 박근혜 탄핵 촛불문화제에서도 있었어요. DJ DOC이 박근혜를 비판하기 위해 만든 `수취인불명`이라는 노래가 여혐논란에 빠졌어요.

너무 돌아왔네요. R이나 DJ DOC이 여혐이다 아니다, 를 말하려는 건 아녜요. 제가 말하고 싶은 건, `여혐`이라는 단어가 우리의 행동을 규율하는 새로운 장치로 들어서고 있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해요. 이 단어로 인해 우리는 우리의 행동에서 전에는 생각해보지 못한 것들을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런 점에서 `여혐`이나 `남혐`은 꼭 파괴본능을 부추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한 번 더 생각한 뒤에 말하게 만든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요, 앞에서 저는 `여혐`이 우리의 `행동을 규율하는 새로운 장치`라는 말을 썼어요. `규율`이나 `장치`, 이런 말에 거부감을 보이실 수 있지만, 저는 이것이 문명 혹은 문화의 핵심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최근에 본 문화에 대한 정의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유발 하라리의 것이었어요. 그는 이렇게 말해요. 문화란 “수백 만 명이 효과적으로 협력할 수 있도록 만드는 `인공적 본능`이다”라는 거죠. 문화는 우리의 야만을 가리고 있어요. 문화는 야만을 은폐하고 억압하는 수단이라고 생각해요. 어떤 야만은 은폐되고 억압되어야 하지만, 또 어떤 야만은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되는 것들도 있어요. 그렇다면 그 기준이 무엇이 되어야할까요? 그것이 사랑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