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 품은 낙동강 이야기 ⑶
北의 낙동강 도하 막은 비산진 전투

▲ 1950년 8월 5일부터 6일까지 비산진 전투가 벌어진 구미 비산동 산호대교 모습. 지금은 전쟁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6·25 발발 그 해 8월5일
낙동강 도하하려는
북한군 저지하기 위해
비산나루터에 병력·화기배치
국군 제15연대 제2대대의
기습공격으로 북한군 섬멸

뗏목으로 강 건너던 민간인들
무고한 희생 기록조차도 없어

□ 6.25 최후의 전선 낙동강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은 `폭풍`이라는 공격명령과 함께 서쪽의 옹진반도부터 개성, 전곡, 포천, 춘천, 양양 등 4개 축선 11개 지점에 이르는 38선 전역에서 남침을 개시했다.

당시 국군은 하루 전인 24일 자정을 기해 그동안 유지해 오던 비상경계령을 해제하고, 사병들에게 농촌 모내기를 도우라며 2주간의 특별 휴가를 준 상태였다.

여기에 북한군은 T-34 소련제 탱크 242대와 170여대의 전투기, 20만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국군은 탱크와 전투기는 전무했고, 20여대의 훈련용 연습기와 연락기가 고작이었다. 상황이 이러하다보니 말그대로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다.

전쟁 발발 4일째인 28일 수도 서울이 함락됐고, 북한군은 이 기세를 몰아 7월 15일 금강을 건너 20일 대전까지 장악한다. 북한군은 8월 15일까지 낙동강을 건너 부산까지 간다는 계획하에 낙동강 도하를 위한 총 공세를 펼친다.

이를 막기위해 미군 제1기병사단의 주력과 제8군 제27연대, 국군 제15연대가 상주를 방어하는데 안간힘을 기울이지만 결국 상주를 북한군에 넘겨주고, 미군 제1기병사단은 김천으로, 제5기병연대 제2대대는 작오산(303고지)으로 철수해 방어진지를 구축한다.

북한군은 낙동강 도하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 북한군의 낙동강 도하를 막아라

북한군의 낙동강 도하를 막기위해 국군 제15연대는 8월 4일 당시 인동국민학교에 집결했다. 이날 오후 3개 대대를 낙동강 강안에 배치하고 연대지휘소를 가산 소복동에 설치했다.

북한군도 낙동강 도하를 위한 준비를 서둘렀다. 북한군 제15사단은 낙동강 대안에 접근해 정찰활동과 소부대 병력으로 급속 도하를 병행하면서 국군의 배치 상황을 살폈다.

북한군은 속칭 지푼다리인 홀소와 북삼의 마진나루터를 이용하려는 전략을 세우고, 병력 일부를 비산나루터 지역으로 접근시켜 국군을 교란시킬 계획이었다.

국군 제15연대 제2대대는 8월 5일 구미 인동의 구포동과 임수동이 위치한 낙동강 동쪽 강기슭인 장암산(157고지)과 동락나루터 사이에 3개 중대를 배치하고, 각 중대로 하여금 전투정찰대를 편성해 강안(江岸, 강가의 언덕)을 탐색하게 했다.

비산나루터에 배치된 제5중대는 이 곳이 옷을 걷고 물을 건너는 도섭이 가능하고, 강변 기슭에 높이 70m의 봉명고지가 있어 도하에 유리한 지형임에 북한군이 급속 도하를 시도할 곳으로 판단, 강변에 미리 준비한 전초진지에 병력과 화기를 배치했다.

▲ 당시 비산나루가 있던 곳으로 북한군의 낙동강 도하를 저지하기 위해 야간전투가 벌어졌던 격전지 모습.
▲ 당시 비산나루가 있던 곳으로 북한군의 낙동강 도하를 저지하기 위해 야간전투가 벌어졌던 격전지 모습.

□ 허를 찌른 기습 공격

8월 5일 밤 11시경 북한군의 요란한 사격이 시작되자 비산나루터에 배치된 제5중대장은 북한군의 공격이 임박했다고 판단하고 안병길 이등중사 등 10명의 전투정찰대를 편성해 대안(對岸)에 침투시켰다.

전투정찰대가 출발한 얼마 뒤에 부중대장인 선임장교가 강을 건너온 피난민 속에 끼어든 북한군의 편의대 2명을 체포하고, 중대의 좌단 청음 초소에서도 강안에 침투한 북한군 1명을 사로잡았다.

전투정찰대는 강 건너 무명고지 북쪽으로 건너가 86고지 일대를 탐색하다 공격준비를 완료하고, 대기 중인 북한군 약 1개 중대를 발견한다.

전투정찰대는 북한군과 너무 근접한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발각될 위험에 있었지만, 그대로 안전지대로 물러간다면 북한군이 곧 낙동강 도하를 시작할 판국이었다.

이에 정찰 대장은 대원들에게 손으로 사격신호를 보내면서 기습공격을 감행했다. 갑작스런 기습공격을 받은 북한군은 당황하며 우물거렸다.

전투정찰대는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다시 중대로 복귀했다. 정찰대의 피해는 경상자 2명 뿐이었다. 기습공격을 받은 북한군이 1시간이 넘도록 낙동강 도하를 시도하지 않자 이를 이상하게 생각한 중대장은 조명탄을 발사하게 했다.

그러자 전방 20~30m 수면에 대나무 30여개가 천천히 움직이고, 그 뒤 40~50m에는 1개 중대 병력이 뒤따르고 있는 것이 발견됐다. 이에 국군은 일제 사격과 수류탄 투척 등 화력을 수중에 집중했다.

북한군의 포탄도 한국군의 진내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약 10분간 진행된 교전으로 수중의 북한군은 대부분 격멸되고, 그 일부는 대안으로 후퇴했다.

중대장은 곧 60㎜ 박격포로 대안 강기슭에 화력을 집중해 적의 퇴로를 차단했다.

날이 밝아오자 중대장은 제3소대의 증강된 1개 분대를 이끌고 대안으로 건너가 무명고지 일대까지 정찰했으나, 북한군은 보이지 않고 부상병만 10여명 웅크리고 있어 그들을 사로잡아 중대로 복귀했다.

□ 국군 전투력을 입증한 비산진 전투

8월 5일과 6일 사이 야간에 벌어진 비산진 전투에서 국군 제15연대 제2대대 제5중대는 낙동강 도하를 시도하는 북한군 중대 병력을 거의 섬멸했다. 특히, 전투정찰대의 공이 컸다. 이 전투에서 한국군의 손실은 부상자 5~6명에 불과했으나, 북한군의 사상자는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였다. 격전을 치른 다음날인 6일 새벽 물위에 떠내려가는 시체만 49구가 확인되었고, 사로잡은 포로도 10여명에 이르렀다.

비산진 전투가 끝나자 대대에서는 북한군의 접근을 조기에 발견할 수 있도록 특공대를 편성해 대안에 침투시켰다.

비산진의 남쪽에 위치한 홀소 나루터와 약목면 덕산동 대안에서도 8월 6일 새벽 전투가 벌어져 북한군 50여명이 사살됐다. 또 국군 제15연대 제1대대는 8월 8일 마진나루터를 도하해 석적의 남율동에 위치한 하의산 고지를 점령한 북한군과 격전을 벌이기도 했다.

비산진 전투는 미군사령부가 부산 이동을 논의할 만큼 위기의 상황에서 가져다 준 승전보였다.

비산진 전투의 승리로 인해 국군의 전투력을 입증할 수 있었고, 북한군이 낙동강 도하를 지연시키면서 북한군의 전력과 사기에 큰 타격을 주고, 국군에는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 항공사진으로 바라본 현재의 산호대교. 산호대교는 본래 비산나루터가 있던 곳이었다. <br /><br />/구미시 제공
▲ 항공사진으로 바라본 현재의 산호대교. 산호대교는 본래 비산나루터가 있던 곳이었다. /구미시 제공

□ 아픔의 역사도 함께

비산진 전투가 북한군의 낙동강 도하를 지연시키면서 국군의 전투력을 입증한 전투로 그 의미가 남다르긴 하지만, 그 이면에는 전쟁으로 인한 무수한 아픔들이 함께한다.

특히, 일반 시민들의 무고한 희생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6.25 최대 방어선이었던 낙동강에는 기록도 되지 않은 무수한 희생들의 기억이 아직 많이 남겨져 있다.

국군과 유엔군은 북한군의 낙동강 도하를 막기위해 각 나루터의 나룻배를 징발했다. 이로 인해 미처 강을 건너지 못한 피난민들은 뗏목을 만들어 타고 강을 건너기 일쑤였다.

그러다보니 북한군이 피난민으로 가장해 건너가는 경우가 빈번했다. 비산진 전투에서도 북한군 편의대 2명이 피난민에 끼어들어 넘어오다 체포당한 기록이 있다.

지역민 안모(80)씨의 증언에 따르면 지금의 선산읍 원3리 부근에 위치한 새도방 나루터에도 피난민들이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너가곤 했는데, 북한군이 피난민으로 위장해 자주 강을 건너가고 하니 어느날 유엔군의 폭격으로 강을 건너던 피난민들이 모두 죽음을 당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는 “전쟁통이었기 때문에 누구하나 그 사람들(죽은 피난민)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없었다”며 “지금은 평온하게 흐르는 저 강물에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죽었는지 상상도 하지 못할거다. 지금도 낙동강은 그 아픔을 안고 흐르고 있음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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