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재휘 논설위원
▲ 안재휘 논설위원

이래저래 기가 막힌다. 예견된 일이긴 하지만, 온 나라가 `적폐청산` 광풍에 휩쓸려가고 있다. 박근혜정부를 넘어서 이명박정부에 이르기까지 블랙리스트와 화이트리스트가 존재했다는 까발림 뉴스가 놀랍다. 국정원을 가재뒤짐해서 밝혀낸, 과거정권이 국가재산을 이용해 `내 입맛에 맞는 사람`을 `건전·우파·애국` 등으로 포장해 지원했다는 의혹은 할 말을 잃게 만든다.

그러나 그 놀라움이 채 가시기도 전에 배우, 개그맨이 마치 작전 중인 첨병처럼 기자들 앞에 차례로 나서서 살기 찬 음성으로 `이명박 단죄`를 부르대는 모습은 더 놀랍다. 미상불 `적폐청산` 구호는 약방의 감초이자 만병통치약으로 마구 처방되고 있다. 정계·언론계·교육계를 넘어서 종교계에 이르기까지 `적폐청산` 기치아래 크고 작은 소동이 번지는 중이다.

문재인정부 들어 부처마다 `위원회`와 `TF(태스크포스)`를 구성했다는 뉴스가 연일 생산된다. 오죽하면 `자고 나면 위원회와 TF가 하나씩 생긴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부처마다 이름은 조금씩 다르지만 `적폐청산`·`개혁` 키워드는 빠짐없이 들어있다. 이들은 과거 정권에서의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겠다는 목표를 공유한다.

부인의 공관병 갑질 논란의 주인공 박찬주 육군대장이 끝내 구속됐다. 당초 `직권남용`으로 걸어보려고 했지만 여의치 않았던 모양이다. 압수수색 등을 통해 들춰낸 `고철업자로부터 1천만 원` 뇌물수수 혐의를 적용했다. 한번 얽어맨 용의자에게 소위 별건(別件)수사를 통해 밝혀낸 제2, 제3의 혐의로 기어이 구속시키는 관행은 여전히 시퍼렇게 살아있다.

재계도 바짝 긴장하고 있다. 경영주체들이 회사경영은 뒷전이고 처세에 더 골몰해야 하는 처지란다. 새 정부 정책에서 획기적인 성장전략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경제수장인 기획재정부장관은 힘이 없다는 말이 나돈다. 4차 산업혁명을 주관하는 과기정통부장관은 통신업계와 씨름 중이고, 산업통상자원부장관도 탈(脫)원전 문제에 빠져 있다.

문재인정부를 떠받치는 진보세력들은 일촉즉발의 `북한 핵` 대응보다 `적폐청산`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는 듯한 인상이다. 하기야 진보세력의 생각이란 `북한은 절대로 한반도에서 핵무기를 쓰지 않을 것`이라는 신념에 뿌리가 닿아 있다. 그들 눈에는 강력한 대북압박을 주장하면서 한미동맹 강화에 몰두해야만 하는 문 대통령의 선택이 사뭇 못마땅할 것이다.

진보언론을 통해서 나타나는 그들의 주의주장들을 보면, 떠름한 표현들이 드물지 않다. 마지못해 떠밀려가는 문 대통령의 대응에 대해서마저 `반대` 입장이 흐드러졌다. 갖가지 불가사유를 붙여가면서 핵무장도 안 된다, 핵잠수함도 안 된다… `안 된다` 타령 일색이다. 안타까운 것은 그들 중 아무도 현실감 있는 대안을 내놓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다.

`촛불정신`은 마치 신흥종교처럼 떠받들어진다. `적폐청산`은 불가침의 경전처럼 운위된다. 주최 측 주장 연인원 1천700만 명 `촛불민심`이 모두 정말 지금처럼 아적(我敵)을 딱 갈라놓고 상대방을 타작하라는 민심일까. 절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구태를 청산한다면서 똑같은 방식을 답습하는 것은 진정한 청산이 아니다. 인민재판식 적폐청산은 또 다른 블랙리스트요, 새로운 적폐로의 전락이다.

당장 핵미사일이 날아올지 모르는데, 언제까지 한가로이 환경영향평가나 하고 있을 건가. 트럼프가 `북한 절멸(絶滅)`까지 입줄에 올리고 북한정권이 이를 `개 짖는 소리`라며 태평양에서 수소폭탄실험을 하겠다는데, 우리 정치권은 `적폐청산`을 놓고 주야장천 드잡이굿판이나 벌일 참인가.

적폐청산은 해야 한다. 다른 세력을 아주 절멸시키려는 작심으로 온 나라를 `위원회`나 `TF` 천지로 만드는 `적폐청산`이라면 옳지 않다. 그나마나, 이렇게 하구한날 밤낮없이 쓰레기통만 뒤집어엎다가 `소`는 누가 키우나. 대관절 언제 키우나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