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모르는 것이 더 많은지도 모르겠어요. 밤하늘은 왜 어두운지, 무게는 어디에서 오는지, 죽음은 무엇인지,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앞으로 우주는 어떻게 변해갈지 등등. 우리는 이런 것들을 알지 못해요. 그렇긴 해도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는 것이 더 나은지도 모르겠어요. 왜냐하면 기필코 알아낼 수 있을 테니까요. 이번 생이 아니면 다음 생에서라도 말이죠. 모르는 것조차 모르면 우리는 모른다는 것이 있는지도 모른 채 그냥 살아가겠죠. 그것만큼 허무한 일이 어디 있겠어요.
▲ 우리는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모르는 것이 더 많은지도 모르겠어요. 밤하늘은 왜 어두운지, 무게는 어디에서 오는지, 죽음은 무엇인지,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앞으로 우주는 어떻게 변해갈지 등등. 우리는 이런 것들을 알지 못해요. 그렇긴 해도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는 것이 더 나은지도 모르겠어요. 왜냐하면 기필코 알아낼 수 있을 테니까요. 이번 생이 아니면 다음 생에서라도 말이죠. 모르는 것조차 모르면 우리는 모른다는 것이 있는지도 모른 채 그냥 살아가겠죠. 그것만큼 허무한 일이 어디 있겠어요.

△훈장과 영리한 제자, 주인과 `다로` 이야기

옛날이야기 하나 해드릴까요? 다들 한 번쯤은 들어본 이야기라 썰렁할 수도 있겠지만 옛날이야기란 게 자꾸 들어도 질리지 않는 법이니까 또 들어도 나쁠 건 없을 것 같네요. 그럼 시작해볼까요. 옛날에 영리한 제자가 하나 있었더랬죠. 훈장이 어느 날 외출을 하면서 이 제자가 마음에 걸려 벽장 항아리에 있는 것을 먹으면 죽는다고 했다죠. 이야기 속에서 금기는 위반을 위해 존재하죠. 위반하지 않으면 이야기를 끌어갈 수 없으니까요. 우리의 주인공은 다른 아이의 등을 밟고 올라가 항아리를 꺼냈다죠. 훈장은 항아리에 담긴 것을 어떻게든 지키려고 그게 독약이라고 말했겠지만, 이 영리한 녀석은 훈장이 그걸 몰래 먹는 걸 보았기 때문에 그것이 꿀이란 걸 이미 알고 있었던 거죠. 그래서 친구들과 조금 맛만 보자고 생각했는데 웬걸, 다 먹어버리고야 말았네!

겁이 덜컥 난 학동들이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이 영리한 제자 녀석은 훈장이 아끼는 도자기를 깨뜨리고 방안을 마구 어질러 놓았어요. 그리고는 꿀단지를 끼고 앉아서는 훈장이 들어오길 기다렸어요. 아이들은 숨을 죽이고 지켜봤겠죠. 훈장이 돌아와 방을 보니 가관이거든요. 제자는 울면서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는데 그 이야기는 더 가관이었다죠. 자신이 친구들과 방안에서 놀다가 그만 도자기를 깨뜨렸는데 훈장님이 그것을 아낀다는 것을 알고 죽으려고 벽장 안에 있는 것을 꺼내어 먹었는데 아무리 먹어도 죽지를 않는다고요.

그런데 이 이야기의 교훈은 뭘까요? 훈장처럼 욕심내면 안 된다? 아니면 훈장같이 권위 있는 사람을 골려 먹음으로써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걸까요? 이야기에서 교훈을 찾는다는 건 어쩌면 진부한 일인지도 모르겠네요. 그래도 조금만 더 생각해보죠. 이 영리한 제자가 완전범죄에 성공할 수 있었을까요? 물론 그럴 리 없겠죠. 얄팍한 말장난은 언제든 들통나기 마련이니까요. 일본에도 이런 비슷한 이야기가 있나 봐요. 거기에는 훈장과 제자가 아니라 주인과 `다로`라는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이야기의 전체 내용은 우리나라의 그것과 별반 다를 게 없어요. 결말에서 조금 차이가 나는데 주인이 다로의 간계를 알아채고 “잡히면 가만두지 않겠다”라며 뒤쫓는 것으로 끝이 난다는군요. 일종의 소극이라고 할 수 있죠.

△앎과 모름의 양태

지젝은 앎과 모름의 양태를 다음과 같이 구분하고 있어요.

“알려진 알려진 것들(known knowns)이 있다. 이는 우리가 알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것들이다. 알려진 알려지지 않은 것들이 있다. 다시 말해서, 알지 못함을 알고 있는 것들이 있다. 하지만 알려지지 않은 알려지지 않은 것들이 있다. 즉 알지 못함을 알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우리가 잊지 말고 덧붙여야 하는 것은 결정적인 네 번째 항목이다. “알려지지 않은 알려진 것들(unknown knowns)”, 즉 알고 있음을 알지 못하는 것들. 이는 바로 프로이트적인 무의식이다. 라캉은 이를 “그 자신을 알지 못하는 앎”이라고 말하곤 했다(슬라보예 지젝, `이라크`, 박대진 외 옮김, 도서출판b, 2004, 19면).

조금 복잡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간단히 말하자면 앎의 양태는 두 가지로 나뉩니다. 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때가 있고 모른다는 것도 알고 있을 때가 있죠. 이럴 테면 우리는 모든 사물에 무게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하지만 무게를 지니게 만드는 것이 힉스 입자일 거라고 추론할 뿐 아직 정확히 밝혀내지는 못하고 있어요. 안다는 것을 안다는 것, 그리고 모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안다는 것. 앎은 이런 식으로 존재합니다.

모름의 양태 역시 두 가지로 나뉩니다. 우선 정말 모를 때가 있어요. 그러니까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것들. 여성을 비하하는 사람들 중에는, 그것이 잘못된 것인지를 알면서도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그것이 잘못된 행동이라는 것을 모른 채 행동하는 사람도 있죠. 알면서도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은 사악한 사람일 것이고, 모르고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은 무식한 사람이 되겠죠.

그리고 마지막으로 알고 있음을 알지 못하는 경우도 있어요. 바로 다로처럼 말이죠. 우츠다 타츠로는 다로의 이야기에서 `억압기제`를 읽어내고 있어요(`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38~43면). 다로는 알고 있음을 모르려고 해요. 뭘 모르려고 하냐고요? 생각해보세요. 주인이 다로가 영악하다는 것을 몰랐다면 꿀을 독이라고 말할 필요는 없었을 겁니다. 그러니까 다로는 자신이 영악한 거짓말쟁이라는 것을 주인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려고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냥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아주 적극적으로 모르려고 한다는 것이죠.

이러한 적극적인 모르려함,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다로는 마음속으로 주인을 깔보면서 자기보다 우둔한 주인이 결코 자신의 속임수를 눈치 채지 못할 거야, 라고 생각하는 거죠. 주인을 속여먹겠다는 이 욕망이 다로를 무지 속으로 끌어들이고, 다로는 이렇게 무지한 상태가 유지되기를 절실히 욕망하죠. 억압기제는 이런 식으로 작동하면서 다로의 개성이나 인격을 형성하게 됩니다.

△치부를 드러내는 일

현실 속에서 `다로`를 발견하는 일은 어렵지 않은 것 같아요. 북한이 핵미사일 실험을 할 때 겨우 대북방송을 하던 정권에 공모하던 그 집권당이 대표적인 예인 것 같아요. `세월호` 사태를 교통사고에 비유하고 `메르스` 사태로 죽은 환자의 숫자보다 감기로 죽는 사람의 숫자가 더 많다고 말했던 그 사람들 말예요. `순실`이 내각을 구성하는데 일조했던 당시의 집권당 말예요. 그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을 잘 알면서도, 그들 스스로가 적폐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애써 모르려고 하죠.

그런가 하면 브레히트 같은 사람도 있게 마련이죠.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브레히트, `살아남은 자의 슬픔`(김광규 옮김) 전문

이 시는 2차 세계대전의 와중에 `나`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진짜 이유에 대해 말하고 있어요. 살아남은 `나`, 더 정확히는 나의 욕망은, 살아남은 진짜 이유를 알고 있으나 그것을 모르려고 했어요. 그런데 `나`는 꿈을 통해서 알게 되죠. `운이 좋아서`가 아니라, 약한 자들의 죽음을 방관하였거나 그러한 죽음에 어떤 식으로든 공모했기 때문에 `나`는 살아남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죠.

 

▲ 공강일<br /><br />서울대 강사·국문학
▲ 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

그런 점에서 치명적인 치부를 폭로하는 일은 우리를 죽이기보다는 다시 살아가게 만드는 것 같아요. 그리고 이것은 주체를 죽음으로 내몰기보다는 죽음에 상응하는 전환을 삶 속으로 도입하죠. 살아남은 자, 즉 `강한 자`는 진실로 강해져야 해요. 약한 자의 죽음을 똑똑히 기억하고 증언하기 위해서 진실로 강해져야 해요.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프리모 레비는 `강한 자`였습니다. 그곳에서의 고통스러운 삶을 기어코 증언했던 그는 진실로 강한 자였어요.

라캉과 지젝은 `모르려 함` 즉 “그 자신을 알지 못하는 앎”에 집중했어요.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의 억압기제이기도 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정신분석은 억압을 해소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억압이 무엇인지 아는 데 목적이 있어요. 억압을 안다는 것은 인간이 억압되어 있음을 안다는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억압되지 않은 인간은 없다는 것을 아는 일이기도 하죠. “인간적인 것 가운데 나와 무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Nihil humani a me alienum puto).” 이것은 라틴어 경구예요. 병리적이지 않은 인간은 없어요. 병리적인 우리가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정치며, 윤리이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