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 품은 낙동강 이야기 ⑴
낙동강과 수운(水運)

▲ 구미에 공단이 조성되기 전의 낙동강 모습. /구미시 제공

인류는 일찍이 물이 있는 강가나 해안가를 중심으로 정착생활을 시작해 문명을 발전시켜 왔다. 현재에도 세계 주요 도시에는 강이 빠지지 않는다.

런던의 템즈강, 카이로 나일강, 빈 다뉴브 강, 서울의 한강 등. 구미 역시 도심을 관통하는 영남의 젖줄 낙동강으로 인해 각 시대마다 많은 발전을 거듭해 왔다.

낙동강 물길을 따라 옛 선인들의 삶과 문화, 역사를 들여다 볼 수 있다. 특히 구미는 낙동강으로 인해 산업도시로 거듭날 수 있었고, 지금은 낙동강의 풍부해진 수량으로 수변도시의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다.

구미는 역사와 문화를 그대로 품고 있는 낙동강을 성장동력으로 삼아 다양한 문화시설을 갖춰 미래 먹거리 사업으로 연결시키려 하고 있다.

천혜의 자원인 낙동강을 이용한 `7경(景) 6락() 프로젝트`와 이를 IT산업과 연계시키는 방향까지 다양한 사업을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본지는 구미 발전의 밑거름이 돼 온 낙동강을 통해 구미의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습을 조망해 본다.

태백산 황지·문경현 초점·소백산맥 등
세갈래의 여울이 모여 525㎞ 큰 강 이뤄
수로교통 중심지로 군사 요충지 역할도

□ 낙동강(東江)의 근원

영남인의 생명줄인 낙동강은 한국에서 가장 긴 강으로 길이는 525㎞이고, 면적은 2만3천384㎢나 된다.

`세종실록 제150권(143)`에 “낙동강의 근원은 세 갈래로 한 갈래는 봉화현 북쪽에 있는 태백산의 황지(黃池)에서 흘러나오고, 한 갈래는 문경현 북쪽에 있는 초점에서, 그리고 한 갈래는 순흥의 소백산맥에서 흘러나온다. 그것이 합류해 상주에 이르면서 낙동강이 되고 선산에 이르러 여차니진이 되며, 인동에 이르러 칠진이 되고… 성주의 동안진, 무계진, 칠원의 우질포, 창원의 주물연진, 김해의 뢰진, 양산의 가야진 등 남쪽으로 바다에 흐른다”고 기록돼 있다.

조선 후기 역사가 이긍익(1736~1806)이 지은 `연려실기술`의 `지리고전`에는 “낙동강은 태백산에서 나와 도의 중간을 그었으며, 남쪽으로 흘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경상도의 한 도(道)는 모두 한 수구(水口)를 이루니, 낙동강은 상주의 동쪽을 말한다. 낙동강의 상·하류는 지역에 따라 이름은 다르지만 통틀어 낙동강이라 부르며, 강의 동쪽은 좌도(左道)가 되고, 강의 서쪽은 우도(右道)가 된다”고 했다.

또 “상주 북쪽 동북 35리에 이르러 낙동강이 되며, 선산 북쪽에 이르러 견탄(犬灘)이 되며, 선산 동쪽에는 이매연이 되고, 여차니진(餘次尼津)이 되며, 선산부 동남쪽으로 보천탄(寶泉灘)이 되었다. 인동 서쪽에 이르러 칠진(漆津)이 되었다”고 했다. 고증에서 나타나듯이 낙동강은 태백시 황지에서 발원해 영남일대의 내륙을 깊숙이 흐르면서 지역민과 애환을 함께 했다.

▲ 황지 입구에 세워진 비석. 1천300리의 낙동강의 시작점을 알리고 있다.<br /><br /> /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 황지 입구에 세워진 비석. 1천300리의 낙동강의 시작점을 알리고 있다. /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 서로 다른 이름의 낙동강

낙동강은 고증에서도 언급했듯이 지역마다 각기 다른 이름으로 불리웠다.

이는 옛부터 물길이 깊은 낙동강을 이용해 부산포에서 보천탄을 거쳐 상주 낙동까지 수상운송이 발달하면서 낙동강 본류를 지나는 각 지역마다 탄의 이름을 별도로 불렀기 때문이다.

여기서 탄(灘)은 여울을 뜻하는 것으로, 강이나 바다의 바닥이 얕거나 폭이 좁아 물살이 세차게 흐르는 곳을 의미한다. 구미지역에는 선산지역의 견탄(犬灘), 석수탄(石首灘), 여차니강탄(餘次尼江灘), 누리탄(里灘), 보천탄(寶泉灘), 감천탄(甘川灘)과 인동지역의 양탄(陽灘), 전탄(箭灘), 백진사탄(白進士灘) 등이 있다.

이 중 견탄(犬灘)은 문경 용추에서 선산부의 북쪽 지역 즉 용산(영산)에 이르는 낙동강의 여울로서, 적어도 800여년 동안 불려진 이름이다.

견탄에는 낙동강 본류 700리의 지점으로 낙동 대수로의 수로운수와 영남대로의 육로운수가 함께 교차되는 곳이기도 해 나라 방비의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했다. 강변의 풍경마저 아름다워 시성들의 노래 소리도 끊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지금의 낙단대교가 놓이기 전까지 오랜 세월 영남대로와 낙동강 수로 선상에서 견탄의 역할은 교통과 군사 요충지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었다.

또 감천탄(甘川灘)은 지금의 감천을 생각해서는 안된다. 지금의 감천 물길은 근대에 와서 물길을 직선화하기 위해 선산 원동 앞을 지나도록 한 것이다.

세종 7년(1425년)에 간행된 `경상도지리지`대천 편에는 “대천이 2개 있는데 하나는 여차니진이 낙동강으로부터 흘러 부의 동쪽을 지나고, 감천은 지례현의 지현으로부터 출발해 부의 남쪽 여차니강에 유입된다”고 했다.

즉 감천이 여차니진이라는 강에 유입되었다는 것이다. 또 `경상도지리지`보다 40년 후에 간행된 `경상도속찬지리지`에는 “부의 남쪽 감천탄은 겨울이 되면 교량을 설치하고 물이 불으면 배를 이용하였다”고 나와있다. 이는 15세기 후반 감천이 감천여울로 처음 표기가 된 것으로, 여울로서의 역할을 했다는 증거가 된다. 당시의 감천은 여울로서 물이 불어나면 나룻배를 이용하는 수로의 역할이 가능했다.

▲ 낙동강의 발원지로 알려진 강원도 태백시 황지의 모습. 이곳에서는 하루에 5천t의 물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br /><br /> <br /><br />/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 낙동강의 발원지로 알려진 강원도 태백시 황지의 모습. 이곳에서는 하루에 5천t의 물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 낙동강 수로교통의 중심 선산부

낙동강이 언제부터 조세의 수로로 사용됐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고려시대 이전부터 조세를 위한 수로로 이용돼 온 것으로 보여진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지형에 완만한 흐름은 당시 수로로 적합해 사람의 수송과 상하류 각 지역의 화물을 운반하는데 용이했을 것이다. 고려시대에 있어 지방통치 조직을 정비할 때 가장 중요시 됐던 것은 농민에게 조부, 공역을 부과하고 이를 원활히 징수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육로와 수로를 통한 징수의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고려시대의 이러한 조세징수 방법은 조선시대까지 발전해 왔으며, 각 지방에서 징수한 조세, 조포, 공물 등은 선박을 통해 수도인 개성까지 운반됐다. 이를 조운(漕運)이라하며 이를 담당한 것이 조창(漕倉)이었다.

`세종실록지리지` 경상도조에는 경상도에서 거두어 들인 세곡은 조창에 모아 해안을 따라 전라도, 충청도의 해로(海路)를 거쳐 수송되었다고 돼 있다.

하지만, 태종 3년(1403) 5월 경상도 조운선 침몰과 선원 익사의 대참사로 조정은 해운을 폐지하고 경상도의 조세를 육로로 수송토록 했다. 그리하여 낙동강 하류에 있는 강변 고을은 세가지 값에 대한 부가조세규정, 즉 뱃값, 인부값, 말값을 규정하고 인부를 모아 배에 짐을 싣게 하고 상주 낙동나루까지 배로 조운을 하게 됐다. 낙동강 본류 700리는 부산에서 상주 낙동까지 해발고도가 90m, 수심이 1.4m이상 확보돼 수운의 조건이 매우 좋은 편이었다.

낙동강 연안의 주요 물산 집산지는 여러 곳이었으나, 선산부의 군정이 수군 중심으로 돼 있는 것으로 보아 선산지역이 수로교통의 중심지였던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세종실록(150권)`에는 당시 선산군을 수호할 군사 중 시위군 165명, 진군 24명, 수성군 41명, 배타는 군사 285명을 두었다고 기록돼 있다. 수군이 총 326명으로 전체 64%를 차지하는 것을 보면 선산군은 낙동강의 수운의 중심지로, 군사력까지 필요한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낙동강 조운의 시대는 고종 31년(1894)에 단행된 갑오개혁으로 공부제도가 현물에서 금납제로 바뀌면서 막을 내리기 시작한다. 여기에 1905년 경부선 철로가 개통되고, 신작로가 개설 되는 등 육로의 교통수단이 발달하면서 낙동강의 수로 교통의 기능은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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