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성식 문화특집부장
▲ 홍성식 문화특집부장

이달 초. 소설가이자 문학평론가였던 마광수 전 연세대 국문과 교수가 스스로 택한 죽음은 두 가지 측면에서 한국사회에 충격을 던졌다.

수십 년에 걸쳐 지식인사회의 위선과 허위의식을 비틀어 조롱해 오면서도 자신의 지향과 뜻을 꺾지 않았던 사람이 왜 갑작스레 세상을 버렸을까. 첫 번째 충격은 이런 의문에서 왔다. 예순여섯 적지 않은 나이에 몸과 더불어 마음까지 약해졌던 것이 이유였을까?

두 번째 충격은 마광수의 사망 후 우리 사회가 보인 반응이었다. 학계의 동료 교수는 물론 적지 않은 독자들도 그간 보이게, 혹은 보이지 않게 그를 힐난해왔던 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대학교수라는 사람이 저렇듯 왜곡된 성의식이 담긴 소설을 쓰다니…” “마광수의 작품은 문학의 가면 뒤에 숨은 포르노그래피다.”

죽음 바로 전까지 마광수는 유교적 엄숙주의가 엄존하는 이 땅의 공적(公敵)으로 취급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그의 죽음 이후 한국 지식인사회와 선후배 작가들이 보인 태도는 그가 살아있을 때와는 딴판이었다. “또 다른 방식으로 권위와 부조리한 질서에 저항해온 용기 있는 소설가” 또는, “실험되기 어려웠던 서구 문학의 전위성을 작품 속에서 구현한 선구자였다”는 뉘앙스가 담긴 뒤늦은 후회의 조사(弔詞)가 신문과 방송, 인터넷 SNS 등에 쏟아졌다.

기자는 기억한다.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에세이) `가자 장미여관으로`(시집) `즐거운 사라`(소설) 등 마광수의 작품이 사회적 논란이 됐을 때마다 한국사회가 보인 호들갑과 “그를 격리·단죄해야 마땅하다”고 목소리 높이던 사람들을. 실제로 1992년엔 언필칭 `즐거운 사라 외설 파동`으로 학교에서 강의를 하던 중 긴급체포 된 마광수가 구속되기도 했다.

한국은 1960년대부터 오래 지속된 군사독재 탓에 `정치적 필화사건`이 적지 않았다. 남정현의 소설 `분지`와 조태일의 시집 `국토`, 이산하의 장시 `한라산` 등은 우방인 미국을 모욕했다는 이유, 노동자와 농민의 반란을 선동했다는 이유, 북한의 시각에서 역사적 사건을 작품화했다는 이유로 한동안 판매금지 됐고, 시와 소설을 쓴 문인들은 대공수사기관의 조사실이나 감옥에서 고초를 겪어야했다.

`이데올로기의 적`이었던 작가를 정치적으로 박해한 것이 무소불위의 정권이었다면, 마광수의 `자유분방한 성적(性的) 상상력`을 강제로 억누르려 한 것은 우리 사회의 경직된 도덕관념이었다.

머릿속으로는 오만가지 음탕한 생각을 해도 괜찮지만, 그걸 글로 표현해서는 안 된다는 보이지 않는 규범. 그 올가미에 걸린 마광수는 `음란문서 제조·반포 혐의`로 재판에 회부됐고,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작가의 자유로운 예술적 상상력이 단죄 받은 것이다. 이후 그가 심한 우울증을 앓으며 학계와 문단의 `왕따`로 살아야했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다. 판검사가 되기 위해 육법전서(六法全書)를 외우건, 농부로 살기 위해 파종법을 고민하건, 시인이 되기 위해 은유를 공부하건 그건 순전히 개인의 선택일 뿐, 그 지향에는 높낮이가 없고 귀하고 천함도 없다.

마광수의 `자유롭고 야하게 살아가겠다는 선언`이 몇몇 사람들의 도덕률에는 거슬렸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시집과 소설이 사람들에게 물리적 피해를 끼친 경우가 있었던가? 타인의 지향과 선택에 대한 존중은 민주주의 국가의 기본이다.

마광수의 죽음은 외설잡지로 불리던 `허슬러`를 발행해 1970년대 미국사회의 손가락질을 받았던 래리 플린트(Larry Flynt)의 법정 진술을 자연스레 떠오르게 한다.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전쟁도 불사한다. 전쟁은 인간을 죽인다. 당신들에게 물어보자. 내가 만든 포르노그래피가 인간을 죽인 적이 있나? 내가 전쟁광보다 나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