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R영화 `동두천` 김진아 감독
미군범죄 이야기 다큐멘터리
베니스영화제서 `VR 스토리상`

▲ 김진아 감독은 최근 `제74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베스트 VR 스토리 상을 수상한 `동두천`을 통해 미군에 의해 살해당안 한국여성 성 노동자가 느겼을 고통을 전달하려 했다. /김진아 감독 제공

네온사인 불빛도 꺼져가는 동두천 새벽 거리.

한 여인이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좁은 골목길을 걸어간다. 그의 쓸쓸한 뒷모습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허름한 여인숙 방안에 들어와 있다. 정면에 보이는 것은 벽지뿐, 그 여인은 온데간데없다.

그러다 살며시 고개를 아래로 내리면 이불 밖으로 흘러나온 흥건한 피와 그 옆에 놓여있는 콜라병 2개가 시야에 들어온다. 관객은 그제야 참혹한 범죄의 현장에 있음을 깨닫게 된다.

김진아 감독의 VR(가상현실) 영화 `동두천`이다. 미군에 의해 살해당한 한국여성 성 노동자에 관한 12분 분량의 다큐멘터리로, 최근 제74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베스트 VR 스토리 상을 받았다. 베니스영화제는 세계 3대 영화제 중 올해 처음으로 가상현실 경쟁부문을 신설했다.

지난 13일 오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 `동두천` 상영 행사에서 김진아(44)감독을 만났다.

`동두천`은 1992년 한국 사회를 큰 충격 속에 몰아넣은 미군 범죄인 `윤금이 살해 사건`을 모티브로 만든 영화다. “그 사건이 발생했을 때 저는 대학교 1학년이었어요. 사건도 심각했지만, 당시 피해여성의 이미지가 그대로 노출되는 것을 보면서 너무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했죠.”

김 감독은 “그때부터 어떻게 하면 비극적 이야기나 피해자가 고통받는 이야기를다룰 때 이미지를 착취하거나 즐기는 대상으로 삼지 않고 이슈를 만들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김 감독은 오랫동안 미군 범죄를 다룬 극영화를 만들려고 시도했지만, 폭력을 재현해야 한다는 점에서 번번이 막혀 포기했다가 VR을 알게 되면서 마침내 뜻을 이룰 수 있었다.

기어를 머리에 쓰고 감상하는 VR은 영화를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체험하게 한다. 360도를 감상할 수 있어 고개를 위로 올리면 밤하늘이 보이고, 시선을 아래로 내리면 길바닥이 보인다. 그러다 보니 몰입감이 상당하다.

`동두천`은 특정 사건이 벌어지거나, 끔찍한 사체가 등장하지 않는 데도 그 장소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공포감을 느끼게 한다.

김 감독은 “관객이 방관자가 아니라 피해자가 느꼈을 고통을 체화하도록 하고 싶었다”면서 “이 영화는 특정한 사건을 넘어 보편적으로 호소하는 힘이 있어 외국 관객들에게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고 전했다.

서울대 미대를 졸업하고 미국 칼 아츠 대학원에서 영화를 전공한 김 감독은 다큐멘터리 `김진아의 비디오 일기`(2002)와 장편 영화 `그 집 앞`(2003)으로 주목을 받았다. 2004년에는 아시아 감독 최초로 하버드대의 초청을 받아 2007년까지 전임 교원을 지냈다. 2015년에는 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 영화·방송·디지털미디어학과 종신 교수로 임용됐다.

국내 관객들에게는 하정우와 할리우드 여배우 베라 파미가가 주연한 영화 `두번째 사랑`으로 알려져 있다.

“제 작품에는 여성의 몸, 몸의 재현, 그리고 여성의 인권과 주체성에 대한 고민이 담겨있습니다. 또 2개 국가, 2개 이상의 언어가 나오죠. 영어로 표현하자면 트랜스내셔널(Transnational)한 작품이죠. 기지촌 여성의 경우 미국도, 한국도 아닌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비참한 이방인으로 살아갔다는 점에서 같은 연장선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VR영화에 처음 도전한 김 감독은 앞으로 VR이 더욱 실용화되면 “다른 세상이 열릴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활약 중인 김 감독은 앞으로 VR영화 시리즈를 내놓을 계획이다. 또 한국영화를 미국에서 리메이크하는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며,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미스터리 스릴러 영화도 준비 중이다./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