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병철<br /><br />시인
▲ 이병철 시인

부안 위도 갯바위에서 60cm가 넘는 광어를 잡았다. 자연산 광어회를 안주 삼아 대낮부터 술을 마셨다. 함께 간 친구들이 열광했고, 나는 낚시인의 긍지와 자부심에 취했다. “자연산은 배가 하얗고, 양식은 얼룩덜룩해. 이만큼 큰 걸 `빨래판 광어`라고 부르는데, 너희가 어디 가서 이런 걸 먹을 수 있겠냐. 따라온 보람이 있지?”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 일장연설을 했다. 행복한 낮술이었다.

그러나 그 광어를 잡기까지 들어간 비용과 시간, 노력을 생각하면 목으로 넘어간 것은 술이 아니라 쓰디쓴 눈물이다. 낚시에 서툰 친구가 내 낚싯대를 부러뜨렸다. 나도 낚시 장면을 촬영하다가 액션캠을 바다에 빠뜨리고 말았다. 그렇게 날려먹은 돈이 20만원 넘는다. 그 돈이면 다금바리도 사 먹을 수 있다. 그뿐이랴. 낚시 장비를 짊어 메고 길도 없는 산중을 헤쳐 미끄러운 갯바위를 오르내리는 일은 온몸이 결리는 중노동이다.

속 쓰리지만 내 손으로 잡은 물고기를 친구들과 나눠 먹는다는 기쁨이 커 손해를 셈하지 않았다. 따져보면 낚시는 비효율적 활동이다. 횟집에서 사 먹으면 비용과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사실 맛도 더 좋다. 하지만 `분위기`라든가 `기분`은 얻을 수 없다. 낭만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게 아니다. 갯바위에서 고생한 이야기, 손맛의 무용담이 술상에 오르는 동안 부러진 낚싯대와 잃어버린 액션캠마저 술안주가 되었다. 보름달이 파랗게 엎질러질 때까지, 밤바다는 꿈결 같았다.

가끔 집으로 손님들을 초대해 직접 요리한 파스타와 스테이크 따위를 대접하곤 한다. 그날은 한나절 내내 손님 맞을 준비로 분주하다. 집 청소를 하고, 장을 보고, 재료들을 다듬어 정성껏 요리하고, 접시에 보기 좋게 담아 상에 올린다. 사 먹는 것보다 더 비싼 돈을 들여 다섯 시간 동안 차려낸 저녁상이 한 시간 만에 설거지거리가 되어도 허탈하지 않다. 요리하는 과정의 즐거움은 물론이고, 음식을 맛본 손님들 얼굴이 환해지는 순간의 기쁨 같은 것들이 삶을 더 아름답게 만든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비효율적임을 알면서도 그 일이 가져다주는 가치를 귀하게 여기는 태도는 `욜로`와 다르다. `비효율의 아름다움`에는 내 유익의 추구만 있는 게 아니라 나를 희생해 타자와 함께 행복하려는 이타적 정신도 포함된다. 허영심이나 속물근성에서 비롯한 과소비는 지양해야 하지만, 세상 모든 것에 `비용 대비 효과`의 공식을 적용해 효율성만 강조하면 우리 삶엔 낭만과 정신적 가치들이 사라질 것이다. 시가 소멸하고, 돈 안 되는 것들은 전부 허섭스레기가 되는 세상, 어쩌면 이미 와 있는지 모른다. 노동과 생산, 부의 축적만을 위해 살아가는 건조한 사회는 백 년 전 `포드주의`나 `테일러리즘`과 다르지 않다.

비효율과 효율의 잣대를 감히 들이댈 수도 없는 문제다. 이기주의와 이타주의, 물질주의와 인간주의의 가운데에 강서구 특수학교 논쟁이 있다. 선과 악의 이분법을 말하진 않겠다. 인간이 모여 사는 사회라면 타인에 대한 이해와 공감, 배려, 그리고 사랑이 있어야 한다. 특수학교 설립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기저에는 “장애 학생을 교육해봤자 그들은 사회에 생산적 기여를 할 수 없다”는 왜곡된 인식과 “특수학교가 생기면 집값이 떨어진다”는 천민자본의 갑질이 깔려 있다. 일그러진 욕망과 이기주의의 방식으로 효율성에만 집착해온 결과다.

특수학교 대신 한방병원이 들어서는 게 그들 삶의 효율성일까. 사전적 의미로는 “들인 노력과 얻은 결과의 비율이 높은 특성”이다. 애써서 이룬 물질적 풍요의 목록에 한방병원은 기꺼이 편입시키면서도, 특수학교 설립이 자신들이 누려야 할 마땅한 `노력의 결과`를 훼손한다는 오해는 끝내 버리지 않을 모양이다. 한방병원이 효율적일지는 몰라도 결코 아름다울 수는 없다. 인간 사회의 소중한 가치를 부디 외면하지 않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