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종<br /><br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언젠가 교정에서 불문과 교수 두 분과 마주쳤다. 나를 포함한 노문과 교수는 3인. 기막힌 가을날이었고, 오후에는 강의도 외부일정도 없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학교 밖으로 나가자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하지만 최종순간 불문과 교수가 “나중에 가죠!” 하고 말을 비틀었다. 노불전쟁이니, 노블하게 한잔 하자더니. 마음을 바꾼 것은 갑작스런 회동이 부여하는 부담이리라 싶었다. 예정에 없는 돌발행동이 야기하는 심정적 무게랄까.

“지금 아니면 안 될 겁니다!” 나의 말에도 결국 그날 행사는 무산됐다. 그 후로 그이는 “기회 닿는 대로” 혹은 “언젠가”, 내지 “조만간” 등등의 어휘를 구사하면서 무산된 기약을 허망하게 확약하곤 했다. 작년에 퇴임한 그분의 동정(動靜)을 아는 바 없다. 하지만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해졌다. 정언명령처럼 내뱉은 “지금 아니면 안 된다!”는 일갈(一喝)의 정확성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된 것이다.

흔히들 “다음에!”라고 말한다. 이런 약속이나 행복의 유예는 일찍이 한국인들이 입에 달고 살아온 익숙한 것이다. 대학입시에 모든 것을 걸다시피 하는 학부모들은 수험생의 희망사항을 대학입학 이후로 유예한다. “대학 가면 해라!” 그런데, 어디 그런가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그들은 취업의 덫에 걸려든다. 부모의 어휘는 자동적으로 바뀐다. “취직하면 해라!” 최소한 4~5년의 유예가 젊은이들을 옥죈다. 그렇다면 `취직`이 최종관문일까?

“결혼하면 해라!”로 텍스트가 변경된다. 결혼하고 나면 다시 “집을 장만하면”으로, 집은 다시 “보다 큰 아파트 평수”로, 아파트는 다시 “미래를 위한 부의 축적”으로 전환된다. 언제나 이런 식이다. 지금과 여기의 행복과 약속은 어김없이 미래의 그것으로 유예되기를 반복해왔다. 이런 상황 탓인지 요즘 젊은이들은 기성세대에게 바라는 게 별로 없는 듯하다. 미래에 현재를 저당 잡히고 살아온 자들에게 무엇을 기대한단 말인가!

그런데 시간의 본질은 언제나 `현재`에 있지 않을까. 우리가 살아가는 시공간의 본원적인 층위는 지금과 여기에 기초하고 있는 게 아닌가 말이다. 지금과 여기가 결석하는, 나의 현존재가 부재하는 과거와 미래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단출하게 말하면, 어째서 미래를 위해 지금과 여기의 행복을 유예해야 한단 말인가. 행복의 완결판은 죽어서야 가능한 것이 아니냐고 한다면 과장일까?!

만일 오늘 먹고 마시지 못한다면 우리 몸은 시나브로 약해지고, 그것이 중첩되면 사멸할 것이다. 행복이나 약속을 자꾸만 유예한다면 영혼도 육신도 조갈증에 시달려 쇠하고 말리라. 행복을 유예함은 현재를 미래에 저당 잡힌 채 사는 것이다. 지금 구할 수 있는 행복과 지금 실현할 수 있는 약속을 자꾸만 뒤로 미루는 것은 노예의 철학이다. 아무런 기약도 할 수 없는 막연한 미래와 기대에 의지하는 허망(虛妄)의 노예.

언젠가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란 말이 유행처럼 번진 적이 있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이 제시한 `현재의 삶에 충실해라!`는 의미의 라틴어 구절. 혹자는 `오늘을 즐겨라`로 누군가는 `오늘을 포착하라`로 번역하는 `카르페 디엠.` 어쨌거나 그 말의 핵심은 행복이나 약속을 먼 훗날로 미루지 않는 것이다. 정말 절실하고 소중하면 그것을 미루면 안 된다. 지금과 여기가 배제된 먼 미래의 행복과 만족이 무슨 대수란 말인가.

그날 우리는 결국 팔공산에 가지 못했다. 가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거나 서운한 것이 아니라, 막연한 미래로 넘겨버린, 이행 불가능한 약속이 새삼 구차한 것이다. 길지 않은 인생행로에서 우연찮게 마주한 짧은 여정의 선물을 뒤로 하고 얻은 게 무엇이었을까, 생각한다. 어쩌면 그런 식으로 우리는 인생의 소중한 약속과 행복을 조금씩 갉아먹고 사는지도 모른다. 가을햇살이 찬란한 시절의 들과 산과 바다가 여러분을 손짓하는 시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