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화도에서 바라본 휴전선, 저녁 무렵 태양이 바다와 섬을 감미로운 빛으로 감싸고 있다. 저 바다와 산은 인간의 것이 아니어서 포근한 빛에 물들 수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 철조망 안쪽은 인간의 것이어서 `울음이 타는` 것처럼 붉다.
▲ 강화도에서 바라본 휴전선, 저녁 무렵 태양이 바다와 섬을 감미로운 빛으로 감싸고 있다. 저 바다와 산은 인간의 것이 아니어서 포근한 빛에 물들 수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 철조망 안쪽은 인간의 것이어서 `울음이 타는` 것처럼 붉다.

1946년 최대의 히트곡은 `가거라 38선`이었다. 이부풍이 작사하고 박시춘이 작곡하였으며, 남인수가 부른 이 노래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아아 산이 막혀 못 오시나요/ 아아 아아아아아 물이 막혀 못 오시나요

다 같은 고향 땅을 가고 오건만/ 남북이 가로막혀 원한 천릿길

꿈마다 너를 찾아 꿈마다 너를 찾아/ 삼팔선을 헤맨다//

아아 어느 때나 터지려느냐/ 아아 아아아아아 어느 때나 없어지려느냐

삼팔선 세 글자는 누가 지어서/ 이다지 고개마다 눈물이더냐

손 모아 비나이다 손 모아 비나이다/ 삼팔선아 가거라…. 하략….(이부풍 작사 `가거라 38선`)

남과 북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산도 아니고, 물도 아니다. 38선은 불가항력적인 것도, 자연적인 것도 아니다. 그저 인간에 의해 그어진 선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38선을 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 `가거라 38선`은 쉬운 가사를 사용하여 호소력 있게 전달하고 있다. “남북이 가로막혀 원한 천릿길”이라는 노랫말은 분단으로 인해 민족 간의 원한이 더욱 확대 재생산 되리라는 것을 예견하고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철저하게 반공을 외쳤던 이승만 정권은 이 곡을 전면 금지했고, 머지않아 전쟁이 한반도를 삼켰다.

`가거라 38선`이 갑자기 떠오른 건 북한의 핵실험 때문이다. 지금 한반도는 긴장국면에 들어서 있고 다시 전쟁으로 치달을 것처럼 긴박한 상황이다. 이런 문제의 근원에 38선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이 선이 그어지자 남북은 대치하게 되었고, 그 대치가 낳은 적대감이 한국전쟁으로 폭발했다고 과언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38선은 오늘날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북위 38도에 그어져 38선이라고 불리는 이 선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여기에 답하기 위해서는 1945년 8월로 돌아가야 한다.

△1945년 혹은 `0년`, 그리고 한반도

이안 부루마는 1945년을 `0년`이라 불렀다. 그도 그럴 것이 이 해에 인간의 모든 역사를 통틀어 가장 파괴적이었던 전쟁이라 할 수 있는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되었기 때문이다. 부루마는 “세계는 어떻게 잔해 속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었을까? 수백만 명이 굶주린 그때, 피의 복수에 몰두해 있던 그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어떻게 사회 혹은 `문명`을 재건할 수 있었을까?”를 물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고 사람들을 기아에 허덕이게 했다. 이 속에서 인간은 치욕적이고 모멸적인 일들을 견뎌내야 했다. 1945년은 `0년`이었다. 인간이 이룩한 모든 것들이 초토화되었다. 그 막막한 폐허에서 인간은 다시 일어섰다. 그리하여 다시 1945년은 `0년`이었다.

그렇다면 1945년은 우리에게도 `0년`이었을까? 우리 역시 폐허 위에서 새롭게 시작할 수 있었을까? 8월 15일 아침, 여운형은 조선총독부의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로부터 일본이 패망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날 밤 건국준비위원회(건준)을 발족시켰다. 건준의 강령은 완전한 독립국가의 건설, 민주정권의 수립, 국내 질서 유지 및 대중생활의 확보였다. 8월 16일 여운형은 휘문중학 운동장 연설에서 해방을 공식적으로 선언했고, 부위원장인 안재홍은 방송 연설을 통해 건준 결성의 목적과 목표를 밝혔다. 이제 조선인의 힘으로 새로운 나라를 설립할 수 있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그러나 소련이 38도선 이북을 점령하고 그 이남을 미군이 점령할 것이라는 사실이 확실해지자 조선총독부는 행정권 이양을 거부했다. 미군은 건준이 아니라 일제에게 우리나라를 무사히 이양 받고 싶어 했다. 그래서 일본은 남한에서 철수하지 않았고, 미군은 일본이 우리나라를 지배하는 것을 용인했다. 미국과 일본은 일종의 동맹적 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그들이 공통으로 맞서고자 했던 세력이 소련과 공산주의였기 때문이다.

미군과 일본의 밀월관계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건이 인천에서 일어났다. 1945년 9월 8일, 미군은 인천에 상륙했고, 많은 인천시민들이 미군을 환영하기 위해 부둣가로 나왔다. 군중을 통제한 것은 여전히 일본경찰이었는데, 그들은 군중들이 저지선을 지키지 않는다는 이유로 발포하였다. 조선인 2명이 사망하고 10여 명이 부상당했다. 미군은 일본을 두둔했고 어떠한 처벌도 내리지 않았다.

9월 9일, 조선총독부에서 미국은 일본으로부터 항복문서가 아닌 남조선의 `식민지 통치권`을 이양 받았다. 일본군은 무장해제 없이 `철수`했고, 맥아더는 포고령 제1호 `조선 인민에게 고함`이라는 이름의 `점령조항`을 발표했다. 이 포고령에서 맥아더는 남조선이 `해방`된 것이 아니라 미군에 의해 `점령`된 상태라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 그는 남조선에 관한 모든 권한을 자신이 가지고 있으므로 자신의 명령에 복종할 것을 조선인에게 요구했다. 특히 제2조는 공공기관과 중요사업에 종사한 사람들이 종래의 기능 및 의무를 계속 수행하라는 내용이었다. 결과적으로 친일의 잔재는 고스란히 남한에 남게 되었다. 우리는 끝이어야 할, 그리하여 시작이어야 할 `0`을 끝내 가지지 못했다.

△해방 후의 운명

해방 후 한반도의 운명을 쥐고 있었던 것은 조선인이 아니라 미국과 소련이었다. 해방의 기쁨이 채 식기도 전에 38선이 그어졌다. 38선을 중심으로 남과 북으로 분할 지배하자고 제안한 것은 미국이었다. 왜냐하면 한반도에서 소련이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미군은 소련군의 남하를 막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소련은 얄타회담(1945.2.8.)에서 180일 이내에 일본과 선전포고를 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전쟁을 미뤄오고 있었다. 8월 6일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자 180일째인 8월 8일 소련은 드디어 일본과의 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소련군은 8월 9일부터 작전을 개시하여 중국, 만주, 사할린, 쿠릴 열도를 공격했으며, 일부 병력을 한반도로 보내 청진, 원산, 웅기, 나진 등을 점령해나갔다.

▲ 공강일<br /><br />서울대 강사·국문학
▲ 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

이 시기 미군은 한반도로부터 1천 킬로미터 떨어진 오키나와에 있었고 한반도에 관심을 기울일 여력이 없었다. 왜냐하면 소련의 남하와 공산주의화를 막을 최북방 한계선으로 일본을 고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련군이 한반도를 향해 진격해오자, 그때서야 비로소 미군은 한반도의 군사적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그대로 두었다가는 소련이 한반도를 모두 삼키게 될 것이라는 위협이 현실로 다가왔고 미국은 다급하게 한반도 분할점령을 고려하였다.

8월 14일, 미군은 소련의 진주를 막기 위해 38도선을 분할선으로 획정하고 그 안을 소련으로 보내게 된다. 소련은 다음 날인 8월 15일 미국의 수락을 승인했다. 이에 대해 강준만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38도선은 미국과 소련 모두에게 놀라움을 안겨 주었다고 한다. 미국은 소련이 이 분할안을 선선히 응낙한 데 대해서 놀랐고, 소련은 위도가 그토록 후하게 남쪽으로 내려간 데 대해 놀랐다는 것이다.”

8월 24일 평양에 입성한 소련은 총 병력 12만 여명을 북한 전역에 배치했다. 그리고 8월 26일부터 38선을 공식적으로 봉쇄했고 남과 북을 잇는 기차, 도로, 전화, 사람과 물자 등을 금지하였다. 1946년 5월,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의 미래와 임시정부 수립에 대비하기 위한 사전 준비모임 성격의 미소공동위원회를 열었으나 이것이 연기되자 전격적으로 휴전선을 봉쇄하게 된다. 이것은 남북분열에서 남북분단의 고착화로 이어졌고, 현재까지 계속되고 진행되고 있는 남북문제의 근원으로 자리잡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