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땀방울이 희망의 꽃으로 ⑤
새마을운동가 구술생애사 채록 편창범 전 경북도 새마을봉사과장(上)

편창범(62)전 경상북도 새마을봉사과장은 새마을운동 지도자는 아니지만 새마을운동의 정신이 계승되도록 하는 여러 사업들의 밑거름을 만들었다.

1975년 공무원에 첫발을 디딘 그는 2008년 10월부터 2011년 1월까지 새마을봉사과장을 거쳐 성주군 부군수, 경북도 정책기획관을 역임한 뒤 현재는 경북행복재단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편창범 전 과장은 지금 건설 중인 새마을테마공원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제1회 새마을박람회를 고안한 인물이다. 편 과장은 1998년 국무총리 표창, 2004년 녹조근정 훈장, 2014년 홍조근조훈장을 수상했다.

그에게서 새마을테마공원의 필요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1975년 공무원 첫 발…첫 임무 2가지는
새마을운동사업·통일벼 재배 권장 업무
농민들 매일 찾아가 식량부족 해결 호소

새마을운동 유산·기록물 등 보존하고파
구미서 `대한민국 새마을박람회` 첫 개최
대통령·국빈·시민 등 참석, 행사 `성공적`

△새마을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할 당시 공직에 들어와

새마을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가 1970년대 잖아요. 좁은 길을 넓히고, 초가지붕 뜯어내고, 담장 허물어 현대식 주택으로 바꾸기 시작할 당시 첫 공직을 시작했어요. 1975년도에. 공무원이 되니까 첫 출근을 바로 면사무소로 오라고 하더라구요. 가니까 당시 가장 큰 업무가 두 가지가 있더라구요. 그 중 하나가 새마을운동 사업이었고, 다른 하나는 통일벼 재배였어요. 당시에는 식량이 부족해 식량자급자족을 위해 생산량이 많은 통일벼 재배를 권장했었거든요. 그런데 이게 당시에는 여러 문제점이 많았어요. 그러니 아무도 통일벼를 재배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왜냐하면 당시 벼농사를 하는 사람들은 그래도 먹고 살만한 사람들이었으니 굳이 통일벼를 심을 이유가 없었던 거죠. 통일벼라는게 사실 외국에서 들어온 종자이다보니 우리나라 기후하고 잘 맞지 않아 제대로 정착이 안되었어요. 벼의 품종에 따라 벼가 크게 자라면 바람에 약해 자꾸 넘어져 버리고, 키가 작게 자라면 벼는 많이 달리는데 이삭이 오래 붙어있지 못하고 빨리 떨어지는 현상이 생기고. 이리저리 힘들었어요. 농촌진흥청에서 육종을 개발하고 우리나라 기후에 접목시키는데 시간이 좀 걸렸어요. 그래도 당시 우리나라는 쌀이 절대적으로 부족했으니 일단 심어야 했지요. 여유있게 육종을 다 개발할 때를 기다릴만한 여유가 없었어요. 그래서 공무원들이 못자리 철이 되면 하루가 멀다하고 농사짓는 사람들을 찾아가 통일벼를 심도록 설득하고 그랬어요. 그래도 안되면 집에 주저앉아 괴롭히는 방법으로 일단 심어만 달라고 조르곤 했죠. 볍씨를 담아 가지고 가면 다 엎어버리는 일은 허다했어요. 그래도 그 분들 마음도 이해는 하니 어쩌겠어요. 다시 일일이 주워 다시 담아가고. 지금 생각하면 거의 반 강제적으로 통일벼를 심도록 한 것 같아요. 그러다 정부에서 이중곡가제를 하면서 사정이 좀 나아졌죠. 통일벼를 재배하면 비싸게 수매해주고, 일반 시민들에게는 싸게 유통시키고. 그렇게해서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쌀 보급률이 점점 나아지기 시작했어요.

 

▲ 대한민국 새마을박람회장을 찾은 시민들이 전시장을 둘러보고 있다.
▲ 대한민국 새마을박람회장을 찾은 시민들이 전시장을 둘러보고 있다.

△새마을운동의 기본 원칙은 경쟁이다

당시에 식량증산과 퇴비증산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어요. 그런데 퇴비는 동네별로 공동으로 만들어 모두가 가져다 쓸 수 있도록 했어요.

당시 새마을운동은 동네 유지들이 중심이 되어 움직였어요. 지금 생각해도 참 단합이 잘 되었어요. 그 중에서도 특별히 단합이 잘 되는 곳도 있었구요.

경진대회와 품평회 같은게 많았어요. 잘하는 곳에 포상도 많이 주었죠. 잘 못하는 곳은 독려를 해주고. 그래서 더욱 열심히 했었던 것 같아요. 그때 눈으로 봤어요. 새마을운동의 기본 원칙 중 하나가 경쟁이라는 것을. 그것이 새마을운동의 성공요인이라고 생각해요.

1971년도 처음 새마을운동을 시작할 당시 8월 말인가 9월인가 정확하게는 기억이 안나는데 360부대 정도의 시멘트를 전국 마을단위로 다 줬어요. 잘하는 마을은 철근하고 시멘트를 부상으로 더주고. 그걸로 동네 들어가는 길을 다 만들었어요. 그때도 공무원들 고생 많이 했어요. 왜냐하면 공사를 할 수 있는 인력과 재료는 있는데 막상 동네길을 만들 수 있는 땅을 살 돈이 없잖아요. 정부도 없고 주민들도 없고. 그래서 공무원들이 해당 주민들을 찾아가 설득해 기부채납을 받았죠. 공짜로 땅을 내어 놓으라고 설득하는게 결코 쉬운일이 아니에요. 그래도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에는 공익이라는 걸, 서로 함께 살아간다는 걸 아는 때였죠. 지금이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겠죠.

△초창기 관 주도는 어쩔 수 없는 상황

새마을운동이 초창기 관 주도로 이뤄졌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는데 이는 정확한 사실을 전혀 모르기 때문이에요. 사실 그런 사람들은 알려고 하지도 않겠지만요. 1970년대 초반까지 경제적 수치를 나타내는 여러 자료를 살펴보면 당시 북한의 경제수준이 우리보다 높았어요. 북한이 우리보다 더 잘 살았던거죠. 새마을운동을 시작하면서 중공업이 확산되고 사람들이 하나로 뭉쳐 경제가 발전하기 시작해 지금의 한국 경제의 밑거름이 된거죠. 그 사실은 어느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이죠. 그럼 여기서 왜 초창기에 관 주도로 이뤄졌나? 당시 모든 일에 공무원이 주축이 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어요. 도로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는 실정에서 사실 부역이라는 표현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공공연하게 주민들을 모아 일을 시켰어요. 국도라고 있긴 하지만 비만 오면 움푹움푹 들어가니 그걸 매워야 하잖아요. 그걸 동네별로 할당을 주었어요. 그 할당받은 구역을 책임을 지고 공무원들이 주민들과 했던거죠. 나중에는 새마을운동지도자 분들이 그런 일들을 대신 해주시긴 했죠.

새마을운동지도자는 아무나 될 수 있는게 아니었어요. 많은 교육을 받아야 했죠. 그런 교육을 받은 새마을운동지도자가 생기기 전 까진 모든 일을 공무원이 할 수 밖에 없었던 거고. 그리고 새마을운동지도자분들이 있다고 해서 그분들이 모든 걸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공무원들이 뒤에서 행정적인 뒷받침은 다 해주어야 했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요.

지금 생각해보면 새마을운동의 가장 큰 성공 요인 중 하나가 교육이었던 같아요. 지도자급은 무조건 교육을 받아야만 했어요. 심지어 스님, 신부, 목사 같은 성직자들도 교육을 받았으니까. 저도 처음 공무원 교육을 받으러 가니 새마을운동 교육부터 받았으니까요. 새마을운동의 정신이 지속이 되어야하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게 잘 안되는 것 같아 안타까워요. 새마을운동의 정신이 지속되었다면 지금의 개인주의는 좀 사라지지 않았을까. 그리고 노인들을 공경하는 사회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요즘들어 많이 하게 되네요.

 

▲ 2009년 구미 박정희체육관에서 열린 대한민국새마을박람회에 이명박 전 대통령이 참석해 참석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2009년 구미 박정희체육관에서 열린 대한민국새마을박람회에 이명박 전 대통령이 참석해 참석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대한민국 새마을박람회를 개최하다

저는 경북도 각 부서 기획파트에서만 16년 근무했어요. 그러다 해양수산부에 파견을 1년 다녀왔죠. 파견을 마치고 돌아오니 김관용 도지사님이 “새마을운동이 중요한데...한번 기획을 잘 짜서 발전시켜보는게 어떻겠나”라고 하시는 거에요. 그래서 새마을봉사과장을 맡게 되었죠. 그때가 2008년 8월이었어요.

사실 새마을과라는게 1970년대 만들어져서 아직까지 존속되고 있는 곳이 우리 경북도밖에 없어요. 그만큼 중요한 자리였고 부담이 되는 자리였어요.

새마을봉사과장을 맡고 나서 보니까 새마을운동에 대한 기록이나 유산이 점점 사라지고 없어지고 있는 거에요. 거기다가 국민들도 새마을운동에 대한 인식이 점점 줄어들고 있고. 그래서 이대로 둬서는 안되겠다 싶어 새마을박람회를 하자고 제안을 했죠. 전국에 있는 새마을운동에 대한 기록이나 유산을 찾을 수도 있을 것 같고, 또 우리지역의 기록물도 찾아야 했으니까요. 그래서 대한민국새마을박람회를 2009년 9월에 구미에서 개최했습니다. 당시 새마을운동세계화사업도 진행되고 있을 때여서 당시 그나라 국빈들도 초대했어요. 이명박 대통령도 참석하시고, 외국의 대사들도 많이들 참석하셨어요. 행사는 성공적이었어요.

구미/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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