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有)에서 유로의 창조는 가능하지만 무(無)에서 유로의 창조는 불가능하다’라는 말을 한번쯤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만큼 ‘무에서 유로의’ 과정은 엄청난 노력과 인재가 따르는 일이다. 또 그 결과와 대가는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에 쉽게 도전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그야말로 무(無)와 다름없었던 포항 무용계의 맥을 살린 인물이 있다. 바로 무용협회 경북도지회장인 무용인 김동은씨.

1953년 영천에서 태어난 김씨는 어릴 적부터 마냥 좋아 시작한 무용으로 경북예술예고에 진학을 했다.

졸업 후 학원 강사로 지내다 무작정 1978년 포항으로 내려온 김씨는 ‘김동은 무용학원’을 개원했다. 여기에서부터 김씨와 포항의 인연은 시작되었고 본격적인 포항 무용계의 역사도 이때부터 쓰여지기 시작한 셈이다.

“무작정 내려오긴 했지만 정말 눈앞이 깜깜했어요, 당시 무용이라고 하면 사교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태반이었죠. 때문에 한동안은 바깥 출입도 자제하고 아이들 가르치는 일에만 열중 했습니다.”

김씨가 무용학원을 열었을 당시만 해도 포항에는 전문 무용학원 자체가 없었다고 한다. 겉은 무용학원이라고 해도 그 안을 들여다보면 대부분 무도학원에 가까운 수준이었다고 하니 당시 상황이 짐작이 간다.

그런 상황에서도 김씨는 학원을 개원한지 1년 만에 당시 시민회관에서 첫 발표회를 가졌고 그 뒤에도 1년여 간격으로 꾸준히 정기발표회를 가졌다.

초창기의 온갖 어려움을 딛고 꾸준히 제자를 지도한 결과 학생들은 하나 둘 대학 무용과에 진학을 했고 이들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비로소 포항에도 ‘전문 무용인’이 점차 늘기 시작했다.

김씨는 포항에 뿌리를 내린지 10년째인 1988년, 제자 홍성란, 손현, 안혜경씨 등과 함께 ‘포항무용협회’라는 큰 결실을 이뤄냈다.

개인 발표회 수준에서 벗어나 협회 차원에서 본격적인 공연이 시작된 것도 이때부터다.

김씨는 그로부터 10여년 동안 포항 무용협회 지부장을 역임하면서 포항 무용발전을 위해 있는 힘과 열정을 쏟아 부었다.

1990년에는 경북 최초로 지역 무용인들의 오랜 바람이었던 포항 시립무용단을 창설했다.

“시립무용단 창설은 단순한 창설의 의미가 아니었어요. 대학에서 무용을 전공하고 돌아온 지역 출신 무용인들이 지역에서 자리 잡고 활동할 수 있는 보금자리인 셈이였었죠”

하지만 당시 무용인들간의 불협화음으로 창단 1년 만에 해체라는 고배를 마셔야 했지만 지금도 시립무용단의 재창단은 김씨의 오랜 바람으로 남아있다.

“지금 포항에는 얼마든지 훌륭한 무용수로 성장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예쁜 아이들이 많아요, 그런데 무용수로서 활동할 공간은 없죠, 때문에 대부분의 아이들이 타 지역에서 공부하고 활동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하루 빨리 포항시립무용단이 재 창단되어서 지역 무용인들이 마음껏 활동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합니다.”

1994년에는 김씨가 이끄는 김동은 무용단이 전국무용제에 참가해 포항의 설화 ‘연오랑 세오녀’를 각색한 ‘동해별곡’이라는 작품으로 장려상을 차지했다.

중앙대학교 대학원 시절에 김씨는 ‘월월이 청청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국내 최초로 ‘월월이 청청’을 본격적인 학문으로 접근한 김씨는 ‘월월이 청청’을 무대에서 공연할 수 있는 길을 터놓았다.

무형문화재에 정식으로 등록된 것은 물론이고 제2회 경주세계문화엑스포 폐막공연에서 선보이면서 전국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 같은 김씨의 무용에 대한 열정이 인정돼 지난 2000년 열린 ‘제5회 삼일문화대상’에서 우수상을, 지난해 ‘제44회 경북도문화상’에서 공연부문 수상을 했다.

“지금은 작더라도 평생교육형태의 무용전문학교를 개설하는 것이 꿈입니다. 그곳에서 우리 전문 무용인들은 물론이고 무용을 사랑하는 일반인들과 함께 무용을 느끼고 함께 한다면 그만큼 값진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25여년간 외롭고 힘든 길을 감수하며 지금까지 포항 무용계를 이끌어 온 ‘포항 무용계의 산증인’ 김동은.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포항무용이 또 한번의 전성기를 맞이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최승희기자 shchoi@kb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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