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병철<br /><br />시인
▲ 이병철 시인

사극 드라마에는 술 마시는 장면이 종종 나온다. 출출하고 입이 심심한 밤에 그걸 보고 있으면 침이 꼴깍 넘어간다. 장돌뱅이가 주막에 앉아 뜨끈한 국밥에 탁주를 들이켜는 것은 그런대로 모방이 가능하다. 집 근처 순댓국집에 가 막걸리 시켜 먹으면 된다. 그런데 정말 넋 놓고 바라보는 그림의 떡은 임금 수라상이나 양반집 주안상이다. 산해진미를 안주 삼아 청자주병의 술을 따라 마신 후 수염을 닦는 그 멋스러움이 부럽다. 아니, 술병에 담긴 전통주 맛이 궁금하다.

공장에서 만들어 유통하는 소주, 맥주만 주구장창 마셔대니 결국 내가 즐기는 건 술이 아니라 알코올의 취기에 불과하다. 진짜 향 깊고 맛있는 술을 음미해본 적이 없다. 와인을 자주 마시는데, 라벨에 적힌 원산지와 수확시기, 포도 품종 따위 정보도 제대로 읽지 못하면서 폼이나 잡는 뜨내기일 뿐이다. 우리 전통주의 경우 내겐 풍문조차 깜깜한 미지의 영역이다.

며칠 전, 전남 순창의 한 식당에서 특별한 경험을 했다. 13세기 고려부터 전해 내려온 우리 전통 명주 호산춘(壺山春)을 마시게 된 것이다. 주인장이 흔쾌히 내어주었는데, 무려 가람 이병기 선생의 외손자인 이연호 명인이 담근 술이다.

맑은 금빛 감도는 술에서 꽃향기가 났다. 달짝지근하면서 개운했다. 뒷맛도 산뜻했다. 입 안에 대숲을 흔드는 바람이 부는 느낌이었다. 술이라기보다는 향기로운 차를 마시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이내 은은한 취기가 생겼다. 화려하게 외모를 꾸미지 않고도 내면에서 우러나는 매력으로 마음을 끌어당기는 사람과 만난 기분이었다.

오늘날 전북 익산시 여산면에 해당하는 호산(壺山)에서 빚은 `춘주(春酒)`다. 멥쌀 곱게 간 것에 뜨거운 물을 부은 다음 차게 식혀 죽을 만든다. 거기에 섭누룩을 가루 내어 섞고 골고루 치대 술밑을 빚는다. 술밑을 뭉쳐 술독에 담아 안친 후 사흘간 발효시킨다. 이렇게 빚은 밑술을 체에 걸러 막걸리를 만든 다음, 하룻밤 불린 찹쌀로 지은 고두밥과 함께 버무려 술독에 담으면 덧술이 된다. 따뜻한 데서 또 사흘간 발효시킨 후 압착, 여과해내면 마침내 호산춘이다.

사람으로 치자면, 뜨겁고 차가운 고난의 온도를 모두 견디고 캄캄한 골방에서 성숙의 훈련을 한 사람, 내면의 불순한 것들을 걸러내 마음이 맑은 사람, 아무리 길고 외로워도 과정의 아름다움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 타자와 기꺼이 버무려지고 때로는 치대임을 당해도 관용할 줄 아는 사람, 유행을 쫓거나 시류에 편승하지 않으면서 자신만의 고유한 멋을 지닌 사람이다.

조선 중기에는 각 지방마다 특산주가 있었다. 서울 삼해주, 충청도 청명주, 진도 홍주, 김천 과하주, 여산 호산춘과 문경 호산춘(湖山春), 그밖에도 벽향주, 죽력고, 이강고, 송순주, 노산춘 등의 우리 전통주에는 술 빚는 사람의 정성어린 손길은 물론이고 달빛과 바람, 해와 구름, 새 울음, 귀뚜라미 울음, 산과 호수가 담겨 있다. 저마다 특색과 개성이 있으며, 맛 깊고 향기로웠을 것이다.

어쩌면 옛날이야말로 다양성의 시대가 아니었을까. 와인은 한 병 한 병마다 맛과 향이 다르고, 한 잔의 술에서 그 술을 빚은 가문의 역사까지 들여다 볼 수 있다. 그래서 때로 좋은 와인을 마시면 가만히 앉아서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여행을 하는 기분이다. 우리에게도 와인처럼 시간과 장소, 그리고 `서사`를 담은 전통주가 있지만 간신히 명맥만 잇고 있다. 전통주의 대중화는 공업용 알코올 같은 소주와 보리차처럼 밍밍한 맥주를 “코가 비뚤어지도록” 마시는 우리 술 문화를 보다 건강하게 바꿀 수 있다. 문화 다양성 측면에서도 바람직하다.

이번 가을엔 말과 생각이 향기로운 사람과 마주앉아 오랜 시간을 견딘 술을 나눠 마시고 싶다. 맑고 은은하게 취해 악수만 하고 헤어지고 싶다. `2차`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