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영세안동시장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15일 광복절 경축사에서 임청각과 석주 이상룡 선생을 예로 들며 독립운동가를 최고의 존경과 예의로 보답하겠다고 역설한 것은 여러모로 상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경축사에서의 언급처럼 임청각은 우리에게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이지만 `항일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하면 3대가 떵떵거리며 산다`는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 역사적 공간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은 유학자이며 안동의진 지휘장이었던 서산 김흥락 선생의 제자로서 일찍이 의병운동에 참가했다.

1909년경부터는 교육의 역할을 중시하는 애국계몽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해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창립하고 시국강연을 전개했다. 그러나 1910년 나라가 무너지자, 신민회의 해외 독립운동기지 건설 방침에 뜻을 같이해 1911년 일가족을 이끌고 서간도로 망명했다.

선생은 이곳에서 독립운동을 위해 전 재산을 처분한 돈으로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했고, 1925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역임하며 대한독립의 기틀을 세웠다. 이후 무장독립운동 단체들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다가 1932년 지린에서 순국했다. 그는 `나라를 되찾기 전에는 내 유골을 고국으로 가져가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선생의 유해는 해방이 된 뒤에도 오랜 세월 타국에 묻혀 있다가, 1990년에 와서야 겨우 고국으로 돌아와 안장될 만큼 예우를 받지 못했다.

선생의 친척과 후손들의 삶은 더 비참했다. 당숙 이승화(애족장)를 비롯해 아우 상동(애족장), 봉희(독립장), 조카 운형(애족장), 형국(애족장), 광민(독립장), 친아들 준형(애국장), 손자 병화(독립장) 등 4대에 걸쳐 아홉 분이 독립운동에 헌신했지만 삶은 파란과 가난의 연속이었다.

1942년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다니던 장남 준형이 일제 치하에서 하루를 더 사는 것은 하루의 치욕만 보탤 뿐이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한데다 손자 병화마저도 1952년 이승만 정권을 반대하다 고문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이로 인해 선생의 손자, 손녀는 해방 후 고아원을 전전하며 생활했다. 특히 일제에 의해 반 토막이 난 임청각이 고국이 해방된 이후에도 후손에게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독립운동가문의 비극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아닐 수 없다.

석주 선생의 후손들이 일제 치하 호적을 거부해 미국적 상태에서 타인 명의로 임청각 등기이전을 한 것은 슬픈 우리의 역사이기에 이것 또한 제대로 되돌려 놓아야 할 숙제가 아닐 수 없다.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처참한 모습이야말로 바로 우리가 되돌아봐야 할 대한민국의 현실이라고 꼬집은 대통령의 말처럼 아직도 일제와 친일의 잔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하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비록 늦은 감이 있지만, 역사를 잃으면 민족의 뿌리를 잃는 것이라며, 임청각 복원을 통해 민족의 자존감 회복을 약속하고, 독립운동가들을 더 이상 잊혀진 영웅으로 남겨두지 않겠다고 한 대통령의 약속은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모든 것을 던진 독립 운동가들과 그 후손들에게 큰 용기와 힘이 될 것이다.

안동시도 `나라가 없으면 가문도 개인도 아무 의미가 없다`는 신념하나로 평생을 구국투쟁에 헌신한 민족 지도자 석주 이상룡 선생과 민족정기의 근원인 임청각의 온전한 복원을 통해 선생께서 끼친 삶의 향기를 널리 전하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콕 찍어 임청각을 복원하겠다는 천명을 계기로 이러한 잘못된 역사의 흐름이 바로잡혔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