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땀방울이 희망의 꽃으로 ④
새마을운동가 구술생애사 채록
이화자 전 경상북도 새마을부녀회장(上)

이화자(76) 전 경북도 새마을부녀회장은 1941년 3월 칠곡군 왜관읍 왜관동에서 1남 8녀 중 4째딸로 태어났다. 왜관초등, 성명여중, 신명여고, 영남대학교 약학과를 졸업한 뒤 23세때 제8114호 약사면허증을 취득했다. 이후 48세때 영남대학교 환경대학원 환경과학과를 졸업했다.

37세때 새마음봉사단 활동을 시작으로 1983년 구미시 새마을부녀회장, 금오새마을 유아원장, 1997년 경상북도 새마을부녀회장, 2006년 경상북도 새마을회 이사를 역임했으며, 새마을운동 도지사상, 새마을운동 국무총리상, 자랑스런구미사람 대상, 새마을훈장 자조장을 수상했다. 2001년 북한돕기 통일손수레 전달사업으로 북한을 방문하기도 했다. 이밖에도 구미시여성단체협의회 1,2대 회장, 전문직여성클럽 한국연맹 구미클럽 창립, 제12대 경상북도 여성단체협의회장, 제5대 구미시차인연합회장 등을 맡으면서 여성의 사회진출에 큰 공헌을 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농사꾼 아버지의 `정직함` 가장 존경
6·25 후 왜관 돌아오니 주변에 시체 널려
약국 경영하다 1977년 새마을봉사단 첫발
당시 구미시장의 “같이 고생해보자” 말에
1983년 구미시 새마을부녀회장 맡아

△ 항상 정직하게

어릴적 기억으로 당시 우리집은 주로 밭농사를 지었는데, 특수작물을 키웠어요. 아버지는 순수한 농사꾼이셨죠. 당시 특수작물이라고 하면 토마토, 가지, 고추, 오이 뭐 이런 것들이에요. 지금은 흔하지만, 당시에는 귀한 채소들이었죠. 밭을 일구고 겨울에 전부 모종을 길러 봄이되면 걷어 들이고, 가을에 걷어 들이고. 한 만평정도 농사를 지었던 것 같아요.

지금은 여건이 좋아 비닐하우스 등에서 특수작물을 키우지만, 당시에는 그런게 없었으니 종이에다가 콩대, 들기름을 발라서 말리고 해서 그걸로 온상을 지어 만들어 그 속에서 작업을 했어요. 정말이지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었죠.

우리가 9남매 였는데 오빠 한 분은 공부만 하고 딸 8명만 농사를 거들었어요. 당시 특수작물을 하려면 화분을 만들어 모종을 하나하나 심어야 했는데 그런 작업들에 우리 딸들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그 연약한 잎들 하나하나 만져야 하는 섬세한 작업이었으니. 농사를 도우면서 옆에서 배운 것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항상 정직하게`이에요. 그 당시에도 특수작물이기에 생산품을 포장해 대구로 나갔어요. 그런데 보통은 가장 좋은 물건을 위에 두도록 하잖아요. 보기 좋으니까.

그런데 우리 부모님은 그러지 않으셨어요. 항상 가장 좋은 물건을 제일 밑에 넣고, 그 다음 차근차근 넣었어요. 그러니 별로 안 좋은게 위로 올라오는 거에요. 그래서 몰래 제일 좋은 걸 위에 놓았다가 꾸중도 많이 들었어요. 그땐 몰랐죠. 왜 꾸중을 들어야하는지. 그래도 부모님이 뭐라고 하시니 따를 수 밖에요. 그리고 포장에 들어가는 개수도 많이 넣으셨어요. 만약에 오이 100개가 들어가는 거면 110개를 넣어야 했어요. 그래야 받아보는 소비자들 기분이 좋아진다고 하시면서. 항상 개수가 많아야 한다고 강조하셨죠.

당시 특수작물이라 굉장히 귀한 농산물이었는데도 말이에요. 그래서 그런가 항상 물건이 없어 못 팔 정도로 상품이 잘 나갔었던 것 같아요. 부모님의 정직함이 최고의 신용이 되었던 것이라고 생각해요. 저도 살면서 부모님의 그런 점을 가장 존경하고 따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지금까지도 말이에요.

△ 돈이 생기면 책을 사서 머리에 저축하라

부모님은 우리 딸들에게만 농사일을 시키기는 하셨지만, 여자도 배워야 한다는고 생각하셨어요. 9남매 모두 대학까지 보내셨으니까요.

당시 여자들이 대학까지 나오는 것 자체가 아주 드문 것이었죠. 6.25사변으로 피난을 갈때가 아마도 제가 초등학교 3학년이었을 거에요. 피난을 다녀와서도 계속 공부를 하도록 하셨으니까요. 당시 피난을 갔다가 돌아오니까 아무것도 없었어요. 학교도 다 타고. 그래도 없어지진 않았어요. 그래서 3학년으로 다시 다닐 수 있었죠. 그런데 너무 무서웠어요. 당시에는.

낙동강이 완전히 격전지였자나요. 집이 왜관이다보니 여기저기 시체가 많았어요. 당시에 옆에 가면 귀신 붙는다고 해서 둘러서 가고 그랬어요. 아무튼 그런 와중에서도 9남매 모두 공부를 시키셨어요. 당시 우리 초등학교에서 중학교에 진학한 여학생은 저 하나 뿐이었어요.

딸 8명을 다 공부를 시키니까 주위에서 뭐라고 하시는 분들이 많으셨어요. 주위에서 부모님에게 “쓸데없이 왜 딸들을 공부를 시키느냐? 농사 짓는데 공부가 왜 필요하냐?”등의 핀잔을 많이 주셨어요.

그래도 부모님은 전혀 개의치 않으셨어요. 부모님은 항상 우리 자식들에게 “돈이 생기면 은행에 저축하지 말고, 머리에 저축해야 된다. 그 돈이 있으면 적거나 많거나 책을 사보고 공부를 해야 된다”고 말씀하셨죠.

부모님의 그런 가르침으로 우리 9남매는 모두 대학을 나올 수 있었어요. 전 신명여고를 졸업하고 영남대 약학과를 갔는데, 약학과에 들어간 특별한 이유는 없었어요. 언니들이 약학과는 아무도 안 들어갔으니깐 약사 공부를 좀 해보면 어떨까 해서 약대를 간 것 같아요.

△ 새마음봉사단으로 새마을운동 시작해

1964년도에 약사면허증을 받고 지금의 남편(이용원 전 구미시의회 의장)과 1966년도에 결혼을 했어요. 그때부터 약국을 열심히 경영했죠. 그때 시장통에서 약국을 했어요.

당시에는 병원에 가기보다 약국에 오는게 수월한 때였어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고, 혹시 아픈 사람들이 있을까 싶어 밤 12시까지 약국 문을 열어두기도 했었죠.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봉사일에도 참여하게 되었어요. 그러다 1977년 새마을봉사단으로 처음 사회에 발을 내디뎠죠.

봉사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그때 전국 건전가요어머니합창단 대회가 있었어요. 그래서 선산군합창단을 조직해 경상북도 대표로 한 세번 나갔어요. 처음에 입상도 못했어요. 그래서 한번은 입상이라도 해보자는 목표로 다시 도전하게 됐죠. 그래서 동상도 한번 타고, 1979년도에는 금상도 탔어요. 세번만에 탄 금상이죠. 그 다음에는 후배들에게 넘겨줬어요.
 

▲ 이화자 전 경상북도 새마을부녀회장이 받은 훈장과 표창. 이 회장은 약사로, 새마을운동 지도자로 나눔과 봉사를 실천하고, 지역발전에 공헌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 이화자 전 경상북도 새마을부녀회장이 받은 훈장과 표창. 이 회장은 약사로, 새마을운동 지도자로 나눔과 봉사를 실천하고, 지역발전에 공헌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같이 고생해보자” 이 말 한마디에

봉사활동을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저에게는 약국 일이 가장 즐거웠어요. 시장 안에 있다보니 많은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었고, 정말 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살아가는게 즐거웠어요. 또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을 서로 도울 수 있기도 했구요. 그런 것들이 너무나 소중하고 즐거웠으니까.

그러다 1983년에 제가 구미시 새마을 부녀회장을 맡게 되었어요. 처음에는 할 생각이 없었어요. 새마을운동에 대해 아는 것도 없었고, 어떠한 준비도 안되어 있었으니까요. 근데 당시 구미시장님이 신우균 시장님이었어요. 내가 이름도 안 잊어버려요. 내가 부녀회장직을 거절하니까 그 분이 매일 공무원을 우리 약국으로 출근을 시켰어요. 나에게 부담을 주려고.

그러다 시장님이 “구미시도 한번 해봅시다. 같이 고생해보자”고 하는 그말에 그만 부녀회장을 맡기로 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약간 속은 것 같기도 하고요..호호

처음에는 내가 새마을운동 정신 이런거 잘 모르니까 그냥 새마을 자체의 본분만 지켜서 열심히 하면 된다고 했는데, 해보니 그것만 해서는 안되겠더라구요. 특히나 구미는 박정희 대통령 생가가 있으니 특히 더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도 엄청났어요.

또 새마을운동에 대한 의지도 워낙 확고하니까 다른 지역보다 더 잘해야한다는 그런 의무감이 막 생기더라구요. 그래서 중앙 연수도 많이 다녔어요. 많이 배워야 했으니까.

그리고 당시 1988년 서울올림픽이 결정되었거든요. 그러니 새마을지도자들이 “지금 이래서는 안된다. 우리가 지난 날보다 더 잘해보자” 이런 의지들이 강했어요. `근면, 자조, 협동`정신이 초심으로 돌아갔다고 할 수도 있겠죠.

구미/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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