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상북도와 경주시가 주최하고 경북매일신문이 주관한 `2017 이차돈 성사 학술발표회`가 27일 국립경주박물관 강당에서 열렸다. 휴일에도 강당을 가득 메운 참석자들이 발제자의 발표를 경청하고 있다.
▲ 경상북도와 경주시가 주최하고 경북매일신문이 주관한 `2017 이차돈 성사 학술발표회`가 27일 국립경주박물관 강당에서 열렸다. 휴일에도 강당을 가득 메운 참석자들이 발제자의 발표를 경청하고 있다.

경상북도와 경주시가 주최하고 본사가 주관해 27일 국립경주박물관 강당에서 열린`2017 이차돈 성사 학술발표회`는 학계, 종교계 전문가들이 대거 참석한 가운데 신라시대 불교 순교자 이차돈(506~527) 순교의 의미와 그에 따른 신라의 변화를 역사적·문화적 관점에서 진단하고 이를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된 의미있는 행사로 평가됐다.

이날 주제발표에 나선 이도흠 한양대 교수와 이용현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사의 발제 내용을 정리했다.

▲ 이도흠 한양대 교수
▲ 이도흠 한양대 교수
`異次頓 記事에서 역사적 반영과 문화적 굴절`

▲ 이도흠 한양대 교수

현존하는 이차돈 자료 중
`반영상`으로 역사적 해석
`굴절상`으로 예술적 해석

이차돈 관련 기사는 이차돈순교와 법흥왕의 불교 공인, 이후의 신라 정치의 변화에 중요한 기점을 형성하기에 역사적, 불교적,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교공인을 진흥왕대로 보는 주장에서 이차돈의 순교와 법흥왕의 신불(信佛)을 부정하는 주장에 이르기까지 아직 논쟁점이 많다.

현존하는 자료 가운데 서사의 틀을 갖춘 이차돈 관련 기사는 `백률사 석당기` `삼국사기` `해동고승전` `삼국유사` `원종흥법염촉멸신` 등이다.

이차돈 관련 기사 가운데 신라 시대에 기록된 유일한 사료는 `백률사 석당기`다. `이차돈 순교비`라고도 한다. 이 비는 이차돈을 추모하기 위하여 818년(헌덕왕10년)에 건립한 것으로 보이며 모두 6면으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결자가 많아 전체 내용을 파악하는 것이 불가하고 추모비이기에 이차돈에 대해 온정적인 입장에서 기록되었다는 점이 사료로서 한계다.

고려 때의 기록으로는 `삼국사기` `해동고승전` `삼국유사` 등이 있다. 이처럼 이차돈 관련기사를 살펴보면, 신라 시대에 기록된 사료는 백률사석당기가 유일하며, 나머지는 고려 시대 때 1차 사료를 참조하여 기술된 2차 사료다.

2차 사료는 인용된 기술의 객관적 타당성과 정확성, 곧 1차 자료 자체가 사료로서 객관성을 검증할 수 없는 상황이며 1차 자료가 객관적 타당성과 정확성을 갖는다 하더라도 이를 어느 정도로 인용하고 가필했는지에 대해 확인할 수 없기에 한계를 갖는다.

다음으로 풀어야 할 과제는 실제 현실과 텍스트로서 재현 사이의 괴리 문제다. 당대의 실제 현실이 텍스트로 재현되면서 어떻게 반영되고 굴절되었으며, 실제 현실과 이것의 차이는 어느 정도이며 거기에 어떤 요인이 작용하였고 그 원리는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다. 이를 위하여 화쟁기호학을 중심으로 방법론을 설정하고 이에 따라 분석하고 해석하기로 한다.

현존하는 자료 가운데 서사의 틀을 갖춘 이차돈 관련 기사들을 반영상과 굴절상으로 분절한 후, 전자에 대해서는 역사적인 해석을 하여 객관적인 사실을 추출하고, 후자에 대해서는 예술적인 해석을 하여 문화적 의미를 추출하고 양자를 종합한 것이 이번 논고다.

반영상에서 현실계는 크게 이사부를 수장으로 한 탁부·풍류도·내물왕계 대 법흥왕을 수장으로 하는 사탁부·불교도·지증왕계의 대립이 치열한 가운데 전자에 소속된 자로 후자와 손을 잡은 이차돈이 법흥왕의 왕권불교와 대립하는 모순으로 여러 역동적인 사고와 실천이 잠재된 상황이다.

굴절상은 불교를 펴는 이치와 이익을 알리려는 효용소와 이차돈을 영웅화 내지 신격화하려는 표현소가 작용하여 이적과 전고, 비유를 통하여 현실을 굴절시켰다. 여기서 진자계는 종교적 진리와 일상, 불교 교리와 실제, 깨달음과 세속, 거룩함과 비천함,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시계추처럼 진동하는 양상이며, 승화계는 후자에서 전자로 지향하여 흥법의 이익으로 오는 환희, 혹은 원융을 이룬 세계다.

▲ 이용현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사
▲ 이용현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사
`이차돈 관련 기사에 대한 비교 분석`

▲ 이용현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사

6세기 전반 신라의 불교 승인
법흥왕 왕권강화 측면의 역사
이차돈 자체 논고는 설화에 치중

이차돈은 신라 법흥왕 때 불교 국가공인 과정에서 527년 순교하였다. 그의 이름은 거차돈, 염촉이라고도 한다. 순교 당시 국왕의 근신으로 내사사인의 직책에 있었다. 법흥왕은 불교를 통해 나라를 발전시키고 불교를 국교로 삼고자 했고, 토착신앙을 바탕으로 한 귀족들의 반대에 당면했다.

이차돈은 왕과 함께 그 타개책을 강구하면서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는 방법을 제안하였다. 이에 이차돈은 왕명을 가장하여 천경림에 절을 지었고, 공사가 시작되고 신하들의 반대가 거세지면서 그 책임을 지고 처형당하기에 이르렀다.

이차돈은 6세기 전반 신라가 국가 차원에서 불교를 공인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이차돈 연구는 대체로 법흥왕의 신라불교 초전과 관련하여 왕권 강화의 측면에서 주로 주목되어 왔다. 그러한 점에서 이차돈 자체에 주목한 논고는 주로 설화 자체에 주목되어 온 감이 있다.

이차돈 관련 주요사료는 다음 네 건이다. (1)삼국사기 (2)삼국유사 (3)해동고승전 (4)이차돈 순교비. 네 가지 사료를 검토해보면, 불사 건립 즉 사찰 건축을 둘러싸고 이를 주장하는 국왕과 이를 반대하는 대신 간에 의견이 대립되었고, 국왕 즉 법흥왕이 거듭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대신들의 강한 반대로 관철되지 못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이차돈을 법흥왕의 “가까운 신하(近臣)”라고 하였다. 이차돈이 법흥왕에 근접하여 거사를 일으키게 된 과정은 사료의 조합을 통해 정리할 수 있다.

이차돈과 법흥왕의 거사 모의는 `삼국사기`를 제외하고 나머지 세 자료에서는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먼저 이는 당연하게도 아주 은밀하게 이뤄졌다. 공통적인 것은 모의 혹은 논의의 중심은 이차돈으로 되어 있다. 네 자료는 모두 이차돈이 제안하고 법흥왕이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성립하는 형식을 갖추고 있다.

네 개의 자료는 각각의 시점에서 거사 진행을 기술하였다. `이차돈 순교비`에서는 국왕이 정전에서 무장무사들을 사방으로 도열시키고 그 안에서 신하들에게 반역여부를 확인하며 윽박지르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삼국유사`도 이와 유사하게 묘사되어 있다. 형틀을 조정에 늘어놓고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였으며 신하들이 벌벌 떨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삼국사기`는 그와는 확연히 다르다. 국왕이 신하들과 불법 실행에 대해 토의하는 듯한 장면을 기술하였다.

이차돈 사후에 장례는 `이차돈 순교비`에서는 북산에 시신이 안장되었으며 서산에 사당이 세워졌다 하였다. `삼국유사`에서는 북산 즉 금강산에 장사를 지냈으며, 자추사를 세웠다고 하였다. `해동고승전`에서도 금강산에 장사지냈다고 되어 있다.

이차돈의 머리가 금강산까지 날아간 것은 그를 금강산에 장사지낸 데에서 소급된 창작일 가능성이 짙다. `삼국유사`에서 이르는 자추사는 `이차돈순교비`에서 이르는 사당과 같은 역할을 했을 것이다. 북산을 금강산으로 인정되는 것은 당연한데, 자추사의 위치를 비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뚜렷한 근거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 참석자들이 발제자의 논문을 유심히 읽으며 발표를 듣고 있다. <br /><br />/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 참석자들이 발제자의 논문을 유심히 읽으며 발표를 듣고 있다. /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 △강석근 경주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장
▲ 강석근 경주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장
새로운 시각에서 의문점 제시

△강석근 경주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장

경주에서는 신라와 관련한 학술발표가 많이 개최된다. 워낙 많은 탓에 발표하는 연구자료들이 중복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이번 이차돈 성사 학술발표회는 새로운 시각에서 새로운 의문점들을 제시하고, 그에 따른 이야기들을 공유할 수 있는 뜻깊은 자리가 됐다.

이 자리에서 우리는 역사적 사실인 이차돈의 삶과 순교가 후대, 현재에 이르기까지 문화적으로 어떻게 굴절돼 왔는지에 대한 발제자와 토론자, 청중들의 의견을 공유하고자 한다.

▲ △법념스님 (경주 홍륜사 한주)
▲ 법념스님 (경주 홍륜사 한주)
이차돈 순교비, 왜 사라졌는지 궁금

△법념스님 (경주 홍륜사 한주)

이차돈의 순교에 대한 재해석 과정에서 고려때까지만 해도 있었던 이차돈 순교비가 어떤 역사적 이유 탓에 없어졌는지 궁금하다.

이차돈의 큰아버지가 이사부이며, 이차돈의 오촌 당숙이 법흥왕이다.

소지마립간 이후 이사부에게 왕위가 계승될 예정이었으나, 지증왕의 집권으로 그의 아들인 법흥왕이 후대 왕이 됐다.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이해와 연구를 통해 이차돈에 대한 역사적 재해석이 필요해 보인다.

▲ △정동락 대가야박물관 학예연구사
▲ 정동락 대가야박물관 학예연구사
이차돈 4개 사료 중 우선은?

△정동락 대가야박물관 학예연구사

삼국유사와 이차돈 순교비는 이차돈의 순교를 영웅화한 반면, 삼국사기와 해동고승전은 나름 객관적으로 쓰려고 한 것 같다.

4개의 사료 중 가장 우선되는 자료는 어떤 것인지 궁금하다.

▲ △이창식 세명대 미디어문화학부 교수
▲ 이창식 세명대 미디어문화학부 교수

이차돈·이사부 관계 설명 필요

△이창식 세명대 미디어문화학부 교수

이차돈과 이사부의 가족관계와 당시 정치적 이해관계에 대해서도 충분한 보충설명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차돈이 불교 융성에 큰 역할을 한 인물이지만 당대에 영웅으로 추대받지 않고 300년이 지난 뒤에서야 순교비가 세워진 이유에 대해서도 연구한 것이 있는지 궁금하다.

▲ △석길암 동국대 불교문화학부 교수
▲ 석길암 동국대 불교문화학부 교수
법흥왕 이전부터 불교는 활용

△석길암 동국대 불교문화학부 교수

법흥왕 시대 불교가 공인됐다는 말은 적절하지 않다.

불교는 법흥왕 이전부터 이미 신라사회에 들어와 있었으며, 당시 시민사회에서 어떠한 형태로든 활용되고 있었다.

따라서 불교의 공인이라는 말이 아닌 이차돈의 순교로 인한 불교의 국가종교화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4개 사료 모두 변용됐을 가능성

▲ △이용현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사
▲ 이용현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사


△이용현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사

우선 4개 자료 모두 변용됐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200~300년이 지난 뒤의 것이기 때문에 1차 자료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우열을 가릴 필요는 없으며, 객관과 주관에 따라 2개 정도 사료가 있다는 것으로 정리하고 싶다.

이차돈과 법흥왕은 각자의 입장에 따라 연합했지만, 당시 정황상 불교를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다만, 이차돈이 신앙심으로 순교한 것인지, 법흥왕의 신하로서 국왕에 충실한 것인지 판단하기에는 아직 자료가 부족하다.

정리/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이바름기자 bareum90@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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