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땀방울이 희망의 꽃으로 ③
새마을운동가 구술생애사 채록
박병군 전 구미시 새마을협의회장(上)

박병군(65)전 구미시 새마을 협의회장은 1952년 6월 구미의 평범한 가정에서 5녀 1남 중 막내로 태어나 어릴적부터 어머니의 극진한 사랑을 한몸에 받으며 자랐다. 구미 인동초등학교와 인동중학교를 거쳐 왜관 순심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새마을운동에 참여해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다.

새마을운동을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은 1971년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새마을운동의 지도자가 아닌 일반 참여자로 15년 동안 봉사활동을 묵묵히 해오다 1985년부터 진평새마을문고 회장으로 지도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이후 구미시 진미동 2통 새마을지도자, 새마을지도자 진미동 협의회장, 새마을지도자 구미시 협의회장, 구미시 새마을후원회장, 새마을지도자 경상북도 협의회장 등을 거쳐 지금은 새마을 중앙회 선임이사를 맡고 있다.

리어카 다닐수 있게 길 넓히고
하수도 교체도 모두 사람 손으로 해
정부에서 준 시멘트 포대
반죽 방법 몰라 무너지기 일쑤
그래도 하다보니 요령이 생겨

△ 하나뿐인 아들이라 사랑을 한 몸에

우리집은 부유한 집안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가난한 집안도 아니었어요.

그냥 평범한 집안이라고 하는게 맞을 거에요. 난 6남매 중 막내였는데 아들이 저 하나였으니, 어머니께서 유달리 절 아끼셨죠. 아들이라고 보리밥도 한번 안 먹이고, 쌀밥만 주셨을 정도였으니.

아버지는 6.25전쟁 이전부터 동장을 하셨다고 들었어요. 동장을 아주 오래하셨다고. 어릴적 기억으론 동네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이 `동장(아버지)하고 같이 있으면 굶지는 않는다`고 그러시더라구요. 그말을 굉장히 많이 들었어요. 나중에 커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당시에 동장들이 배급을 타서 주민들에게 나눠주는 게 있었나봐요. 근데 아버지는 항상 식구 수보다 많은 수를 불러서 배식을 받아 주셨던 모양이에요. 아무래도 정상적으로 배식을 받으면 부족하니까. 한 가정에 5명의 식구가 있으면 7명이 있다고 속여서 7명의 배식을 받아다 주는 식으로. 그런식으로 도와주셨던 모양이에요.

그래서인지 동네에서 아버지는 거의 유지셨어요. 동네에서는 사람들로부터 존경도 받고 하셨지만, 사실 집에서는 아무 일도 안하시는 분이셨어요. 어머니가 모든 일을 다 하셨죠. 밭일이며 모든 걸. 생계는 어머니의 몫이었어요. 어머니는 그렇게 고생을 하시면서도 군소리 한번 안 하시는 분이셨어요.

저에 대한 교육열도 높으셔서 참 많은 교육을 시키셨어요. 당시에 약목, 칠곡까지 가서 교육을 받았을 정도니까. 근데 내가 워낙 농띠(공부 잘 안하는 학생을 가리키는 경상도 사투리)라서 어머니가 속이 많이 상하셨어요.

△무명 지도자로 15년간 새마을운동 하다

1970년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안 농사일을 도왔어요. 그러다 새마을운동이란 게 시작됐어요. 농사일이란 게 농번기가 아니면 시간이 있잖아요.

그래서 나도 새마을운동에 동참을 하게 됐어요. 사실 동참이라고 이야기하기도 뭐하지만. 당시 새마을운동이라는게 좁은길 담을 뚫고, 집 뒤로 나오는 하수도를 흄관으로 교체하고, 길을 넓히는 그런 일이었어요.

마을 안쪽 길을 보수하고, 학생들이 학교를 편히 다닐 수 있도록 길을 만들어 주는 그런 일들이었죠. 동네 사람들 모두가 같이 해야하는 일이었어요. 그런데 당시에는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 흔치 않았어요. 내가 나이가 어리긴 했지만 고등학교까지 졸업한 사람이었으니 여러 일들에 불려다녔어요.

요즘 같으면 사진도 찍고, 측량도 하고 해서 금방 공사를 진행할 수 있었겠지만, 당시에는 모두 사람이 직접 손으로 다 해야했어요. 그러니 조금이라도 배운 사람이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가 새마을운동 1세대라고 할 수 있죠. 그분들이랑 참 열심히 했어요. 당시 우리 동네 새마을운동 지도자를 맡으셨던 반영복, 추영석 같은 분과 함께 일했죠. 그분들 따라 다니면서 동네 도랑도 만들고, 길을 넓혀 리어카가 다닐 수 있게 하고 했으니까.

지금 생각하면 그때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싶어요. 사실 너무 힘들었거든. 기술도 없으면서 무조건 밀어붙였으니까. 그러다보니 시행착오도 많았어요. 당시에 정부에서 마을개선사업을 하라고 시멘트를 몇 포씩 줬었어요. 그래서 옥계 한천까지 가서 직접 모래를 퍼 왔죠. 근데 아무도 시멘트 반죽을 할 줄 모르는 거에요. 지금 생각하면 웃기지도 않지.

반죽이란 게 질어도 안되고 되도 안되는 거거든. 시멘트 기술이 없으니 반죽이 잘못돼 풀썩 주저앉기도 하고. 실수 투성이었어요. 그런데도 정말 열심히 했어요. 포기할 만도 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지도자들이 항상 옆에서 격려를 해줘서 그랬던 것 같아요.

할 수 있다는 힘을 불어넣어 주었거든. 실패도 여러 번 하면 요령이라는게 생겨요. 진짜에요. 다 하는 방법이 생기더라니까.

나중에는 그냥 눈대중으로 해도 반죽이 척척 맞아 들어가더라구. 전문가가 다 된거지.

그래도 가장 생각나는 건 일 끝마치고 다 같이 탁주 한잔하던 게 가장 기억에 남아요.

당시에는 마을 지도자가 항상 탁주 한사발씩 사주었거든. 같이 땀흘려 일하고 지도자가 사주는 탁주 한잔 마시는 재미도 새마을운동의 묘미였다고 생각해요. 하하

▲ 박병군 전 회장은 이제껏 여러 상을 받았지만, 그중에서도 이 상이 가장 마음에 든다고 했다. 새마을운동을 상징하는 새벽종 형상 때문이라고. 아직도 가끔 그 시절이 생각나 종을 한 번씩 쳐 본다고 한다.
▲ 박병군 전 회장은 이제껏 여러 상을 받았지만, 그중에서도 이 상이 가장 마음에 든다고 했다. 새마을운동을 상징하는 새벽종 형상 때문이라고. 아직도 가끔 그 시절이 생각나 종을 한 번씩 쳐 본다고 한다.

△진평동 새마을문고회장으로 지도자 첫 발

1970년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부터 동네 새마을지도자를 따라 다니면서 새마을운동을 해왔죠. 15년을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하니까 지역사회에 어느정도 알려지기 시작했었나봐요. 사실 이름 없는 지도자라고 봐도 무관했어요. 사실 나도 지도자 교육을 이미 다 받았었거든요. 그것도 여러 번 받았어요.

새마을운동에 대한 교육이 좋아서 내가 찾아가서 받은 것도 있어요. 그만큼 새마을운동이 좋았어요.

1985년도에 진평새마을문고 지도자로 임명되었어요. 내가 사는 동네는 아니었지만, 처음 지도자라는 직함을 달았으니 정말 열심히 하고 싶었어요. 그 전에는 문고에는 지도자가 없었거든요. 그러니 더욱 열심히 할 수 밖에요.

새마을문고사업은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도서관이 없는 지역에서 주민들이 필요로 하는 책을 쉽게 빌려 볼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사업이었어요.

1970년대 후반부터 새마을운동이 정신적 측면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발전함에 따라 시작된 사업이었죠. 전 새마을문고가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특별한 공간이 되길 바랐어요. 새마을운동이 현재를 위한 정신운동이라면 새마을문고는 미래를 위한 정신운동이라 생각했거든요. 그러기 위해선 우선적으로 새마을문고의 틀을 잘 만들어야 했어요.

또 도서비품 구입과 도서 확충 등 독서기반 시설에 대한 부족한 재원 등을 충원할 방법을 찾아야 했죠. 그래서 많은 분들을 찾아 다녔어요.

지금도 감사한 게 모두 흔쾌히 성금과 도서를 기부해 주셨어요.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단순한 독서를 하는 새마을문고에서 취미교양교실 등을 운영하면서 시민들에게 찾아가는 새마을문고로 발전할 수 있었어요.

그렇게 5년이라는 시간을 새마을문고 지도자로 지냈어요. 이후 진미동 새마을지도자 협의회장, 구미시 새마을지도자 협의회장 등을 하면서도 새마을문고에 대한 애착은 한 번도 버린 적이 없어요.

새마을문고는 사실 우리나라 독서문화 보급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어요. 하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인색하기만 하죠.

지금은 아파트마다 작은 도서관 등이 운영되고 있지만, 사실 이런 게 운영되기 시작한 게 얼마나 되었나요? 불과 몇 년 전이에요. 각 지역에 도서관 하나 변변하게 없을 당시 새마을문고에서 책을 빌려 읽으며 꿈을 키워 온 청춘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우리나라가 이만큼 발전하기까지 뭐 하나 그냥 된 게 없어요. 경제든 문화든 모든 방면에서 노력한 사람들이 있지요. 그 사람들이 한 일에 대해 이제는 있는 그대로 평가해 주었으면 합니다. 새마을문고도 이젠 제대로 된 평가를 받을 때가 됐다고 생각해요.

/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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