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핵무기 보유를 현실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북핵 용인론`에 이어 `주한미군 철수론`이 미국과 중국에서 잇따라 제기되고 있다. 이 같은 주장은 북핵 해결을 위해서는 군사옵션 카드가 무모하다는 판단이 지배하기 시작한 것이 배경이다. 한국의 운명을 결정할 이 같은 의제가 우리와는 무관하게 불거지고 있어 심히 우려스럽다. 위험천만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살펴볼 일이다.

한때 트럼프 대통령의 오른팔로 통했던 스티브 배넌 전 백악관 수석 전략가는 진보 매체 아메리칸 프로스펙트와의 인터뷰에서 “중국이 북핵을 동결시키는 대가로 주한미군을 철수하는 딜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해 파문이 일었다. 그는 비록 쫓겨났지만, 백악관 일각에서 주한미군 철수 문제가 거론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른바 `북핵 용인론`은 오바마 정부의 외교·안보팀 책임자들이 선도하고 있다. 제임스 클래퍼 전 국가정보국장(DNI)은 CNN 방송과의 회견에서 “북한에 가서 보니 비핵화는 애초 고려할 가치가 없는 생각"이라며 “미국은 북핵을 받아들이고, 통제해야 한다”고 말했다. 수전 라이스 전 국가안보보좌관도 최근 뉴욕타임스 기고문을 통해 “냉전시대 소련핵무기 수천 기를 용인했던 것처럼 북한핵무기를 용인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리처드 하스 미 외교협회(CFR) 회장은 한 기고문에서 “북한 문제를 풀 수 있는 좋은 옵션은 없다. 이제는 차악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다. 제프리 루이스 미들베리연구소 동아시아 비확산 프로그램 국장은 최근 포린 폴리시(FP) 기고문을 통해 “게임은 끝났다. 북한이 이겼다”고 평가하기까지 했다.

중국의 전문가들도 가세하고 있다. 베이징대 제다레이(節大磊) 국제관계학 교수는 한 인터뷰에서 “미·중 양국은 북한을 합법적인 핵보유국으로 인정해선 안 되지만, 이제는 (비핵화가 아닌) 핵 억지에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중국 푸단대 미국연구센터 우신보(吳心伯) 주임은 “미국은 북한의 핵 보유를 인정해야 하며, 북한의 새로운 핵 개발 프로그램을 동결하는 데 집중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조지프 던퍼드 미국 합참의장이 배넌의 발언에 대해 “나는 주한 미군의 축소나 철수에 대해 어떤 논의에도 관여한 적이 없고, 알지도 못한다”고 강력 부인한 것은 다행이다. 주한 미군기지는 미국의 이익을 위한 충분한 전략적 가치를 갖고 있고, 미국 역시 자국의 이익에 반하는 결정을 내릴 가능성은 낮다. 하지만 `가랑비에 옷 젖는다`는 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정치권부터 한미동맹에 충격을 주는 일이 없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주한미군 철수`는 그 의제의 부각만으로도 한국의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에 재앙을 몰고 올 최대의 악재다. 결단코 막아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