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재휘<br /><br />논설위원
▲ 안재휘 논설위원

“내가 대통령으로 있는 이상 우리 60만 군대는 한 명도 못 움직입니다. 한반도를 전쟁터로 만드는 것은 절대 안 됩니다. 전쟁이 나면 북한은 휴전선에서 남한의 주요 도시를 일제히 포격할 겁니다. 우리가 6·25 때 수없이 죽었는데 지금은 무기도 훨씬 강력해졌어요. 전쟁은 절대 안 됩니다. 나는 우리 역사와 국민에게 죄를 지을 수는 없소” 1994년 새벽 김영삼 대통령이 미국 클린턴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에서 했다는 말이다.

2015년 발행된 `김영삼 회고록`은 당시의 상황을 `일촉즉발의 위기`라고 표현하고 있다. 미국의 항공모함과 순양함의 영변 핵시설 및 평양 폭격에 대비해 주한미군 가족과 민간인 및 대사관 가족을 서울에서 철수시키려는 계획까지 발표되기 직전이었다는 것이다. 당시의 결정을 뒤늦게 후회했다는 위키리크스의 폭로는 미스터리로 남아있지만, 한동안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은 `전쟁을 막았다`는 자부심이 대단했던 것 같다.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밝힌 `레드라인(Red line)` 발언을 놓고 여야 정치권이 연일 난타전이다. `레드라인`은 대북정책에서 봉쇄정책으로 전환하는 기준선을 의미한다. 문 대통령은 기준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북한이 ICBM 탄도미사일을 완성하고 거기에 핵탄두를 탑재해서 무기화하는 것을 레드라인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자유한국당 이철우 최고위원은 “북한이 ICBM에 핵 탄두를 싣는 날은 세상이 망하는 날이지, 레드라인이 아니다”라고 매서운 비판을 날렸다. 바른정당 주호영 원내대표 또한 “ICBM 핵탄두 탑재를 레드라인이라고 했는데 그 이전까지는 실험을 허용한다는 것인가”라고 파고들었다. 박주선 국민의당 비대위원장은 “레드라인이 이미 임계점에 도달한다고 하면 이에 대한 대책은 무엇인지, 전쟁 없다는 말로 전쟁 없어지고 비핵화 실현되는 건지 구체성이 없다”고 꼬집었다.

적지 않은 외교·안보 전문가들이 문 대통령의 `레드라인` 답변을 실수 내지는 패착이라고 일컫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더불어민주당은 “우리가 주도적으로 해야 한다는 점에서 대통령이 말씀을 잘 했다”면서“대통령이 안보와 외교 문제에 관한 한 단호한 원칙과 입장을 밝힌 것”이라고 옹호하고 나섰다.

“전쟁만은 안 된다”는 말은 구구절절 옳다. 그러나 미국을 향해 던진 “한반도에서 군사행동은 대한민국만 결정할 수 있다”는 말은 마땅한 수단이 없는 공허한 결기다.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하지만, 만에 하나 북한이 진짜로 괌을 향해 미사일을 쏘는 날이면 어찌할 것인가. 한미동맹을 깨지 않는 한 우리는 미국과 함께 행동해야 한다.

조지프 던포드 미국 합참의장은 최근 “동맹국 중 하나의 국가, 한쪽에 대해 공격이 있는 경우, 미국과 동맹국 전체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기자회견 발언에서 “북한이 어떤 수단으로든 미국을 공격하면 모두가 파멸”이라는 정도라도 경고했어야 맞지 않았을까.

온갖 악조건을 물려받은 상황에서 전쟁참화를 막아내야 하는 문 대통령의 번민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아마도 밤잠을 이루기가 어려울 것이다. 다만, `동맹파`의 이성이 기여할 여지가 없도록 온통 `자주파` 참모들에 둘러싸인 현실이 걱정거리다. 북한이 이미 핵무기를 개발했다는 사실이 인정되고 있는 한, 대륙간 탄도탄(ICBM) 이야기는 강 건너 불일 따름이다.

고려대 남성욱 교수의 “ICBM에 핵탄두를 탑재하는 단계는 레드라인이 아니라 모든 대책이 무용지물인 `블랙라인` 단계”라는 지적에 눈길이 간다. 한국의 입장에서 북한은 이미 레드라인을 넘었다. 우리는 이미 레드라인과 블랙라인의 중간 어디쯤에 놓여서 죽느냐, 항복하느냐 고민해야 하는 딱한 처지로 내몰려가고 있는 지도 모른다. 끔찍한 `미군철수`, `북미평화협정` 이야기가 어느새 여기저기에서 불거지고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