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땀방울이 희망의 꽃으로
②새마을운동가 구술생애사 채록
이태봉 전 경북도 새마을협의회장 (上)

이태봉(71·사진) 전 경상북도 새마을협의회장은 1946년 8월 구미시 사곡동에서 태어났다. 28살 때인 73년도에 육군 병장으로 만기 제대한 후 동네에서 예비군 소대장을 맡아 일을 하다 1980년 사곡동 7통 새마을 지도자로 새마을운동과 첫 인연을 맺는다.

이후 사곡동 지도자 협의회장, 1995년 구미시 새마을 협의회장, 2000년 경상북도 새마을협의회장, 새마을 중앙회 이사 등을 역임했다. 이후 2010년부터 2015년까지 경운대학교에서 새마을아카데미에 참여해 외국인들에게 새마을운동을 전파했다.

주민들 모여 풍물놀이로 성금 거둬
자동차 배터리 구입해 첫 전깃불 켜
구미시 지원으로 현대식 주택 개조

△ 모두가 가난했던 그 시절

부모님은 남의집 허드렛일을 하셨지만, 마음만은 누구보다 넉넉한 분들이셨어요

우리 세대 대부분 그렇겠지만, 우리집도 많이 가난했어요. 모두가 가난했으니까. 뭐 특별한 것도 아니지.

부모님은 남의 집에서 허드렛일을 해주고 사셨어요. 당시에는 남의 집 머슴살이가 흉이 아니었어요. 먹고 살기위한 하나의 방법일 뿐이죠. 그런 품팔이라도 해야 가족들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으니까. 난 그런 집에 4남매 중 3째였어요.

어릴적 내 기억에도 우리 집은 정말 많이 가난해서 먹을게 항상 부족했어요. 근데도 아버지나 어머니는 먹을게 있으면 항상 주위 사람들과 나눴어요. 진짜 조그마한 것도 주위 이웃들과 나누는 분들이셨어요. 전 어린 마음에 그런 부모님이 원망스러웠어요. 당장 내가 배고프니까.

하지만, 그런 부모님 덕분에 주위분들은 항상 절 보면 많이 이뻐해 주셨어요. 제가 살아오면서 그런 부모님의 덕을 많이 봤죠.

제가 식당을 했었는데 오시는 손님들 중 대부분이 부모님을 기억하시면서 “정말 좋은 분들이셨다. 그 집 아들이 하는 식당이니 자주 와야지”라고 많이들 이야기 하세요. 그 덕에 돈도 꽤 벌었어요. 내가 장사를 잘 했다기 보다 부모님의 덕을 본 거라 할 수 있죠.

▲ 도로확장공사로 집을 잃고 산 중턱에 흙벽돌로 다시 마련한 집. 당시 집 짓는 기술이 부족해 집이 허술하다.
▲ 도로확장공사로 집을 잃고 산 중턱에 흙벽돌로 다시 마련한 집. 당시 집 짓는 기술이 부족해 집이 허술하다.

△ 하루아침에 살던 집을 잃고…

1970년도로 기억하고 있어요. 당시 우리집은 국도변에 살고 있었는데 도로확장 공사를 한다면서 집을 비워달라고 하는 거에요.

당시는 선산군이었죠. 그때 군수님이 직접 찾아와서 우리 부모님께 어디든지 집을 지을 수 있으면 옮겨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도로 위쪽 산골짝으로 집을 옮기게 됐어요. 근데 아무것도 없는 곳이었어요. 옷가지와 살림가구만 가지고 옮겨온거에요. 산 중턱에 뭐가 있었겠어요.

당시는 지금처럼 보상비 많이 달라 뭐 그런 이야기를 하던 시절도 아니였으니까. 그런걸 아예 몰랐어요.

옮기긴 했는데 그 곳은 전기도 안들어오고, 길도 없었어요. 정말 호롱불 켜놓고 살 수 밖에 없었어요. 우리집만 그런게 아니라 같이 옮겨 온 30여 가구가 모두 같은 상황이었어요.

그래도 어떻게 하겠어요. 일단 살아야하니, 서로서로 도와주고 해서 흙벽돌로 집을 짓고 살았죠. 집 짓는 기술도 없어 엉성하긴 했지만요. 그때 엉성한 집들이 세워지면서 지금의 웃막골이 만들어 진거에요.

그러다 군에 다녀오고나서 동네에서 예비군 소대장을 맡았어요. 동네에서는 그래도 소대장이라고 저의 말을 조금 들어주시더라구요. 그러다 새마을운동을 한번 해보라는 권유를 받았어요. 그래서 1980년도에 주민총회에서 새마을 지도자로 선출됐죠. 사곡동 7통 새마을 지도자로.

지도자로 선출되고 5박6일 동안 새마을 지도자 중앙교육을 이수했어요. 그때 여러 선배 지도자들로부터 성공한 사례담을 들으면서 나도 교육을 마치고 돌아가면 우리 동네를 반드시 바꿔 놓겠다고 다짐했어요.

▲ 1982년 주택개량사업을 위해 중장비가 마을에 들어오고 있는 모습.
▲ 1982년 주택개량사업을 위해 중장비가 마을에 들어오고 있는 모습.

△마을에 전기가 들어오던 날

80년도에 마을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으니 얼마나 불편한게 많았겠어요. 그래서 가장 먼저 마을에 전기부터 넣어야 겠다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그보다 더 시급한게 있더라구요. 길이 있어야 전기도 들어올 거 아니겠어요.

그래서 주민분들하고 마을정비사업을 하나씩 해 나갔어요. 어린 학생들 등굣길도 만들고, 여러 일을 많이 했어요. 길을 넓히고 해서 자전거나 리어카, 소형 차량 정도는 다닐 수 있는 길을 만들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게 뭐 대단한 일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모두 사람 힘만으로 했으니까 당시에는. 대단한 거에요. 일단 길은 어떻게 만들긴 했는데 전기는 사람 힘으로만 되는게 아니더라구요. 돈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고민 끝에 모금운동을 하기로 하고, 풍물놀이를 할 수 있는 분들을 모아 사물놀이패를 만들었어요. 매일 연습을 시켰죠.

우리가 살고 있는 곳부터 한집 한집 돌려 풍악을 울리기 시작해 여러 곳을 돌았어요. 지역 유지분들을 초대해서 공연도 하고 취지도 설명했죠.

반응이 좋았어요. 약 일주일간 했었는데 백미 2가마니와 현금 150만원이라는 성금을 모았으니까. 아주 큰 돈이었지만, 자가발전기를 살 수 있을 만큼은 안되었어요. 그래서 주민총회를 열었죠. 그 결과 각 가정에 자동차에 들어가는 전기 밧데리 1개씩을 구입해 작은 전구에 불을 켤 수 있도록 했어요.

비록 10일정도 사용하고 나면 다시 그 무거운 밧데리를 들고 나와 충전해야하는 불편함이 있었지만, 우리들의 힘으로 마을에 전기를 공급한 그날의 기쁨은 이루 말로 표현하기 힘들었죠. 그 조그만 전구에 불이 들어오는 것이 신기하고, 뿌듯해 뜬 눈으로 밤을 지새기도 했으니까요.

▲ 판자촌 집에서 현대식 주택으로 바뀐 모습.
▲ 판자촌 집에서 현대식 주택으로 바뀐 모습.

△ 현대식 주택을 마련하다

비록 자동차 밧데리를 이용하는 전기였지만 우린 `해냈다`는 자신감을 얻었어요. 그게 더 큰 거였죠.

먹고 살기 힘든 동네가 서로 힘을 합치니 하는 일마다 전부 잘 된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때마침 1986년 아시안 게임을 우리나라에서 개최한다는 발표가 나면서 경부선 철도변 정비사업이 시작됐어요. 이때다 싶었죠. 주택 계량사업을 시작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동사무소와 구미시청, 경북도청을 수십 번 찾아가 호소했어요. 그 결과 주택계량사업입지지구로 선정받게 된거죠.

우리 동네 헌집을 뜯는 조건으로 그 자리에 15동의 현대식 주택을 지을 수가 있었어요. 그런데 문제가 있었죠. 공사 자재를 수송할 수 있는 길이 없는 거에요. 기껏해야 리어카 정도가 오갈 수 있는 길이었으니. 그 길도 경부선 철도변을 따라 다니는 길로 확장이 불가능 했어요.

근데 구미시 공무원들이 나서서 도와주었어요. 공무원들의 행정적인 도움으로 당시 시유지였던 하천 제방을 따라 석축을 쌓고 해서 시멘트와 골재를 실은 차량이 오갈 수 있는 길을 만들 수 있었죠.

우린 공사비를 최소화하기 위해 합동 작업반을 구성해 함께 공사를 했어요. 그래서 대지 100평에 건평 20평이라는 아담한 현대식 농촌주택 15동이 세워지고, 계량 화장실 15개도 함께 만들어졌어요. 또 상수도와 하수도도 만들어지고, 그렇게 원하던 전기도 들어왔죠.

이 사업이 성공하자 다른 동네 주민들도 현대식 집을 원했어요. 그래서 또 다시 건의해 나머지 20동도 현대식 주택으로 바꾸게 되었어요.

구미에서 가장 빈민촌으로 꼽히던 웃막골이 새마을운동으로 달라지기 시작한 거에요.

구미/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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