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병철<br /><br />시인
▲ 이병철 시인

지난 주말 강원도 양구에 다녀왔다. 공병 장교 생활을 그곳에서 했다. 장맛비와 폭설 사이 민들레 피고 단풍 지는 일 세 번 겪으니 민간인이 됐다. 교통사고로 죽을 뻔 했고, 혹한기 훈련 도중 할아버지 임종 소식을 들었다. 거기서 만난 사람들의 눈빛, 전방 밤하늘을 수놓던 은하수, 고통스러운 기억들이 이제는 같은 문양으로 어우러져 가을빛처럼 잔잔하다. 양구가 특별한 이유는 또 있다. 한국인이 사랑하는 화가 박수근의 고향이다. 군 복무 스트레스가 심하거나 가족들이 몹시 보고 싶을 때 눈 쌓인 길을 걸어 박수근미술관에 가곤 했다. 꽁꽁 언 손발을 녹이며 미술관에 들어서면, 그림은 잘 모르지만 마음이 편했다. 가족과 이웃,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을 따뜻하게 그려낸 그림 앞에서 괜히 눈물 나곤 했다.

토요일, 미술관엔 서늘한 하늘이 내려앉아 있었다. 햇살은 뜨겁지만 바람에선 젖은 낙엽 냄새가 났다. 재촉하지 않아도 가을은 계절의 문 뒤에 벌써 와 서성이고, 내 가슴 속에도 누구 것인지 작은 발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가난과 병, 온갖 불행 속에서도 따뜻한 `인간의 마음`을 놓지 않았던 박수근의 그림들을 보며, 한 예술가의 위대한 영혼 앞에 숙연해졌다. 그는 “천당이 가까운 줄 알았는데 멀어, 멀어….”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는데, 지금쯤이면 도착했을 것이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몇몇 화가 이름 주워들어 아는 주제에 미술을 좋아한다고 떠들곤 했다. 지적허영이 문제다. 누구나 알만한 유명 화가 아니면 외국 거장들의 그림이나 돼야 볼만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문화 사대주의도 참 고쳐지지 않는 병이다. 박수근미술관에 오면 1전시관의 박수근 작품만 눈 여겨 보고는 2전시관 국내 현대화가 그림들은 아예 안 보거나 보는 둥 마는 둥 했다. 이날도 학예사가 `제1회 박수근미술상` 수상 작가인 황재형 화가 기획전까지 관람할 것을 권했으나 마음이 이미 저녁 술상 앞에 가 있어서 내키지 않았다.

그런데 황재형 화가의 작품과 마주서자 내 뻣뻣한 태도와 애써 힘준 어깨의 긴장이 다 무너져 내렸다. `검은 울음`, `탄천의 노을`, `귀가`, `사망진단서`, `아랫목`, `이른 장마`, `광부초상`, `어머니` 같은 그림들을 볼수록 내 마음 속수무책이었다. 가슴 저리고 눈물 나는 걸 어쩌지 못해 숨골로 묵직하고 뜨거운 것이 자꾸 오르내렸다. 그가 그려낸 탄광 막장 속 광부들의 삶에는 꾸며지지 않은 날 것의 숭고함과 감동이 있었다. 광부 화가 황재형의 삶을 들여다보면 더 먹먹해진다.

황재형은 전남 보성 사람이다. 1952년 태어나 중앙대에서 회화를 전공했다. 20대에 이미 명성을 얻어 성공의 길을 걸을 수 있었음에도 돌연 태백 탄광촌으로 들어가 세상과 단절하며 살았다. 광부의 아이들을 가르치고, 캄캄한 갱도에 들어가 석탄을 캤다. 그러면서 광부들의 삶과 탄광촌이 쇠락하는 모습, 태백의 자연을 캔버스에 그렸다. 30여년을 광부 화가로 살았다.

“70년대 후반부터 소재를 얻기 위해 탄광촌에 드나들었는데 어느날 문득 더 이상 관찰자로서만 그곳을 기웃대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 길로 짐을 싸 황지로 가는 열차를 탔습니다. 제대로 광부를 그리기 위해선 내 스스로 광부가 돼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한백, 정동, 구절 탄광 등을 전전하며 광부 생활을 시작했지요.”

그는 “막장에선 삶의 마지막 희망이 별처럼 빛난다”면서 흑탄더미 속으로 팔을 집어넣어 별처럼 빛나는 것들을 만지고 끌어안고 울어 삼켰다. “예술가는 죽는 날까지 자신의 작품을 온몸으로 사는 것”이라는 신념대로 자기 삶을 탄광 속에 불꽃으로 던져놓고 그 광휘가 밝히는 사람과 자연의 얼굴을 그렸다. 시커멓게 흐르는 탄천 위로 금빛 노을 내려앉은 그림 속 풍경을 오래 잊지 못할 것이다. 아아 내 시는, 내 문장은 지금 어느 안락한 자리에 멀뚱거리고 서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