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 영 미

물푸레나무 아래서

너를 만나면

내 손엔 먹과 붓 한 자루 들려 있겠네

물푸레나무 가지 아래로

뚝뚝 떨어지는 푸른 수액을 받아

햇살에 데워 먹을 갈면

너는 화선지를 곱게 펴고

천년을 족히 선명히 살아 숨쉴

심장에 각인된

붉은 문장 하나 꺼내 적겠네

검푸른 먹물을 찍어

매(梅) 난() 국(菊) 죽(竹)

그런 고매한 그림들 그리지 않아도

나는 좋겠네

물푸레나무 아래서

너를 만나면

네 푸른 노래 한 소절이면

더는 욕심 부리지 않겠네

물푸레나무 아래서 너를 만나면

천년을 마르지 않을 붓 한 자루 꼭 쥐고

절대로 놓지 않겠네

물푸레나무 푸른 수액을 달인 물에 먹을 갈아 글씨를 쓰면 천 년이 지나도 바라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티브로 시를 풀어나가는 시인은 이 땅의 여인네들의 아름답고 눈물겨운 전통을 이어가려는 마음을 품고 이 시를 쓰고 있는 것이리라. 청청한 물푸레나무 수액으로 쓴 붉은 문장 한 구절과 푸른 노래 한 소절은 정갈하고 고매한 시인의 정신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