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민 호

이 세상 왔다 가는데

무슨 묘비가 필요한가

봄에는 진달래 산천

그것이면 족하지 않나

여름에는 흰 구름 산을 넘고

그 하늘만 바라보면 그것으로 족하지

가을에 단풍 들어 나뭇잎 지면

산들바람 불어 먼 산을 돌아나가고

겨울엔 흰 눈 내려 가지마다 꽃인데

그 꽃만 바라보면 되는 것을

돌에 새겨 둔 몇 자의 글귀가

영원히 잠자는 시인에게 무슨 소용 있으랴

경주의 원로시인인 정민호 시인은 평생을 겸허한 무위의 시를 써온 시인이다. 정민호 시인은 우리시대의 진정한 선비이고 비움을 실천해온 시인이다. 어느 시인의 묘비를 바라보면서 자연에서 왔다가 자연으로 돌아가는데 무슨 묘비가 필요한 것이냐고 반문하며 그 어떤 세속적인 명예나 소유나 욕망도 버리겠다는 마음을 펴 보이고 있는 것이다. 무욕의 삶으로 일관되었던 시인의 생을 관조하는 그윽하고 따스한, 깊은 눈빛이 그리워지는 아침이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