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은 정몽주와 영천 임고서원

▲ 커다란 은행나무가 입구를 지키는 임고서원. 가을이면 아름다운 풍광까지 사람들에게 선물한다.

글 싣는 순서

1. 동방이학지조(東方理學之祖) 포은의 생애와 사상
2. 빛나는 사액서원(賜額書院)… 영천 임고서원을 찾아
3. 포은의 숨결 되살리는 임고서원 충효문화수련원

고금(古今)과 동서를 불문한다.

지도자에게 바라는 보통 사람들의 요구는 크게 다르지 않다.

`경제 발전`과 `문화 진흥`.

이 두 가지 숙제를 풀어갈 능력을 가진 권력집단은 백성 또는 국민이라고 불리는 이들에게 외면받지 않는다.

그러나 당대의 경제와 문화가 가진 문제점과 그 해결 방안을 고루 살펴 물질적인 측면과 정신적인 차원 모두에서 사람들에게 만족을 줬던 권력자는 많지 않았다.

이는 역사책을 뒤져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일이다.

오늘날까지도 세계인들에게 벤치마킹의 대상으로 인정받는 고대 그리스의 문화·경제적 선진성은 `아고라(agora)`에서 꽃핀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시국가였던 그리스의 시민들이 모여 “무엇이 우리를 경제적 충족감과 문화적 충일감으로 이끌 것인가”를 토론했던 광장을 뜻하는 아고라.

“놀랍고 찬란하다”는 평가를 받는 그리스의 문화예술적 성취는 바로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시대를 뛰어넘어 서양과 동양의 통치권자는 유사한 고민을 했다. 조선의 왕들에게도 문화적 측면에서 `아고라`의 역할을 수행할 공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서원(書院)이다.

조선의 통치이념인 유학(儒學)을 진흥·교육하는 동시에 그 시대 사회를 이끌어가던 지역의 주요 인사들에게 문화와 학문의 거점을 만들어주고자 하는 요구에서 생겨난 서원.

 

▲ 두 명의 왕으로부터 편액을 하사받은 임고서원은 포은 정몽주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포은이 살아 돌아와 서원을 산책하는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br /><br />삽화/이찬욱
▲ 두 명의 왕으로부터 편액을 하사받은 임고서원은 포은 정몽주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포은이 살아 돌아와 서원을 산책하는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삽화/이찬욱

◆ 조선의 왕들, 임고서원에 편액(扁額)을 내리다

그렇다면 이 서원들이 필요로 했던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충절을 지킨 동시에 학문적 성취까지 이룬 선현(先賢)`이었다.

그러한 상징적 인물을 서원의 중심에 세움으로써 국가에 충성을 다하고 부모에게는 효를 행하며 유교의 경전(經典)을 연구하는 지역의 젊은 인재들을 키우고자 했던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보자면 포은 정몽주는 서원의 정신적 지주가 되기에 충분한 사람이었다.

자신이 섬긴 왕을 배신하지 않았고, 부모에게 지극한 효심을 보였으며, 성리학의 핵심을 꿰뚫고 있던 인물이 바로 포은.

정몽주를 추모하고 학문적 업적을 이어가기 위한 목적에서 세워진 것이 바로 영천의 임고서원이다.

조선의 13대 왕인 명종은 임고서원에 수많은 책과 함께 편액(扁額·종이나 나무판 위에 글씨를 쓴 액자)을 내렸다.

조선의 왕이 직접 쓴 글씨가 걸린 서원은 특별히 사액서원(賜額書院)이라 불린다. 당시 임고서원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는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은 영천 충효문화수련원 김명환 원장이다.

“임진왜란 때 임고서원이 불에 타 무너졌습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선조(조선 14대 왕)가 지금의 위치로 서원을 옮겨 지었죠. 1603년의 일입니다. 그때 선조는 다시 한 번 편액을 내림으로써 임고서원의 지위를 높여주었다고 합니다.”

두 명의 임금이 편액을 하사한 사실만 봐도 임고서원과 정몽주가 지닌 당대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취재를 위해 임고서원을 찾았던 날. 가장 먼저 기자를 반긴 것은 `임고서원 은행나무`였다.

경상북도 기념물 63호인 이 나무는 높이가 20m에 이르는 거목이다.

수령이 500년이 넘었다는 은행나무의 당당한 기품이 포은의 드높았던 기상을 자연스레 떠오르게 했다.

또한, 단풍으로 물든 가을날의 임고서원 풍광을 상상하게 만들었다.

 

▲ 개성의 선죽교와 같은 크기로 만들어진 영천의 선죽교. 뒤로는 임고서원의 기와가 미려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 개성의 선죽교와 같은 크기로 만들어진 영천의 선죽교. 뒤로는 임고서원의 기와가 미려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포은문집`과 `지봉유설(芝峯類說)`, 포은 영정 등 만날 수 있어

현대에 와서 임고서원이 새롭게 정비된 과정을 영천시청은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2006년부터 임고면 양항리 일원에 198억 원의 예산을 투입해 유물전시관(포은유물관)과 생활체험관(충효관), 개성의 선죽교를 본뜬 다리 등을 만들었습니다. 유물전시관은 성리학의 보급과 생활 속 실천에 힘쓴 포은과 관련된 유물을 전시합니다. 또한, 이곳을 찾는 어린 학생들을 위해 임고서원 연혁과 정몽주 선생의 일대기를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해 영상실에서 상영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신임해준 왕에 대해서는 충성을, 낳아준 아버지와 어머니를 위해서는 효도를, 선배 학자에게는 신의를, 아랫사람에게는 너그러움을 보여준 포은.

임고서원에서 만난 충효문화수련원 이원석 교학부장에게 물었다.

 

▲ 임고서원 유물전시관에서 만날 수 있는 `지봉실기(芝峯實紀)`
▲ 임고서원 유물전시관에서 만날 수 있는 `지봉실기(芝峯實紀)`

“전시된 유물 중 가장 귀한 것은 어떤 것인가요?”

다소 거칠고 우매한 기자의 질문에 이 교학부장의 현명한 대답이 돌아왔다.

“포은의 인품과 학식을 생생하게 화폭으로 옮긴 영정 3점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것 외에도 `포은문집`과 `포은집`,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는 `지봉유설`도 전시하고 있고요. 더불어 수백 권의 귀한 책들이 있습니다. 어느 하나만을 귀하다고 지목해서 말하기는 어렵습니다.(웃음)”

영천 정신문화의 알짬을 간직한 임고서원 주변에는 포은과 관련된 유적지도 많다.

대표적인 것이 ▲포은의 부모 묘소(서른 살이 되기 전 부모를 모두 여읜 포은은 아버지와 어머니 묘소에서 각각 3년을 시묘살이 했다) ▲유허비(경상북도 유형문화재 272호로 포은의 효심이 알려지자 나라에서 `孝子里(효자리)`라고 새겨진 비석을 영천 우항리에 내렸다) ▲조옹대(포은이 낚시하며 시상을 떠올리던 공간) ▲포은 생가(2015년 완공된 목조건물로 임고서원에서 차로 10분 거리) 등이다. 최근 들어서는 임고서원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의 발길도 부쩍 늘었다.

파란 눈동자를 빛내며 그 옛날 한국 왕조였던 고려의 역사에 관심을 보이는 이들이 많아진 것이다.

또 한국 문화에 대한 호기심을 가진 해외동포의 자녀들이 서원을 방문해 잊고 살았던 우리네 전통문화의 향기에 흠뻑 빠지는 경우도 많다는 게 영천시의 설명이다.

“어느 순간부터 언론 보도와 입소문을 통해 포은 정몽주와 임고서원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인터넷카페, 블로그, 밴드 등을 통한 온라인 홍보도 이곳을 찾는 학생들이 늘어난 이유 중의 하나일 겁니다”라고 임고서원 충효문화수련원측은 부연했다.

 

▲ 임고서원엔 수백 권의 귀한 고서적이 전시돼 관광객을 반긴다.
▲ 임고서원엔 수백 권의 귀한 고서적이 전시돼 관광객을 반긴다.

◆`영천 선죽교`를 거닐며 개성 선죽교를 떠올리다

마지막으로 개인적 체험 하나를 이야기하고 싶다.

남북관계가 좋았던 2000년대 중반. 20여 명의 남한 국어학자와 함께 휴전선을 넘어 개성을 찾았다.

북한의 국어학자들을 만나 `남북한 통합 국어사전`의 제작을 논의하는 자리에 취재기자로 참석한 것이다.

길고 길었던 학자들의 회의가 끝난 후 평양에서 파견된 북한측 안내원이 “고려박물관과 선죽교에 가보지 않겠느냐”고 제의했다.

학자들과 기자들 모두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개성의 선죽교는 생각보다 작고 초라했다.

고려 말 대표적인 충신이자 대학자가 지조와 신의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린 흔적은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그 고적한 풍경 속으로 스산한 가을바람이 불어왔다. 10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날 본 개성 선죽교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 속에 선명하다.

그리고 2017년 여름. 다시 선죽교와 만났다.

이번엔 개성이 아닌 영천에서였다. 포은의 피살지인 동시에 기울어진 왕조 고려의 멸망을 상징하는 다리가 개성과 똑같은 크기와 모습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 포은이 유배된 사람들의 복권을 청하며 올린 오죄상소문(五罪上蔬文). 임고서원 유물전시관에서 만날 수 있다.
▲ 포은이 유배된 사람들의 복권을 청하며 올린 오죄상소문(五罪上蔬文). 임고서원 유물전시관에서 만날 수 있다.

조선의 명필 한석봉이 `善竹橋(선죽교)`라고 쓴 글씨를 탁본해 세운 비석이 눈에 들어왔다.

충효와 단심(丹心)이란 단어가 한없이 가벼워진 오늘날. 우리는 포은의 삶과 죽음에서 무엇을 배워야 할까? 임고서원은 어떤 의미로 후대의 가슴 속에 남을까?

역사를 연구해온 학자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과거에서 교훈을 얻는 민족의 미래는 결코 어두울 수 없다”고. 그렇기에 포은과 임고서원은 우리의 과거인 동시에 미래다.

이어지는 여러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해질 때쯤, 관복을 갖춰 입은 푸근한 얼굴의 포은이 느린 걸음으로 임고서원을 산책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것은 환시(幻視)였을까?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저작권자 © 경북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