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병철<br /><br />시인
▲ 이병철 시인

“타자는 지옥이다.”

사르트르의 유명한 말이다. 혼자서 알몸으로 있다가 누가 지켜보면 부끄러워 옷을 입는다. 혼자 노래 부르며 춤추다가도 뜨거운 시선이 느껴지면 중단한다.

길에서 넘어졌을 때 아무도 없으면 엉덩이를 붙잡고 실컷 아파하지만 보는 사람이 있으면 `쪽팔려서` 얼른 일어난다. 내 행위의 자유를 앗아가므로, 타인의 시선은 감옥이고 지옥이다. 타자의 시선들로 이뤄진 `감시`의 사회를 미셸 푸코는 `파놉티콘`(원형감옥)이라고 했다. 어디에나 보는 눈들이 있다. 시선을 수단으로 과시와 감시, 증명과 확인, 관음과 노출이 이뤄진다. 굳이 시선이라는 작용이 아니더라도 타자는 그 존재 자체로 지옥이다. 나에게 고통을 줄 때 특히 그렇다. 타인의 체온, 냄새, 분비물, 소음, 신체접촉으로 가득한 출퇴근길 지하철을 우리는 지옥철이라고 부른다. 폭언과 욕설을 들으면서, 종근당 운전기사들은 이장한 회장이 지옥의 사자 같았을 것이다. 매일의 노동을 보람으로 여기던 급식조리사들에게 이언주 의원의 막말은 지옥의 언어가 되었다. 음주운전 차량에 사고를 당해 장애를 안고 사는 사람, 헤어진 연인에게 염산 테러를 당해 얼굴이 녹아내린 채 평범한 삶을 박탈당한 사람에게 타인은 지옥일 수밖에 없다. 일상의 사소한 순간들도 내 상황과 환경에 따라 천국과 지옥을 오간다. 마음이 여유로워 차 한 잔 마시며 책을 읽을 때 창밖에서 들려오는 이웃 여자아이의 리코더 소리, 옆집 마늘 빻는 소리는 더없이 정겹고 편안하지만, 온 신경을 집중해 예민한 글쓰기를 하고 있을 때는 밤새 귓가에 앵앵거리는 모기보다 성가시다. 아침잠을 방해하는 공사 소음도 지옥의 소리, 어떤 이는 잠깐의 작은 지옥을 참지 못하고 뛰쳐나가 타자에게 영원한 지옥을 안겨주기도 한다. 고층 아파트 작업자의 생명줄을 끊은 잔혹한 살인범처럼 말이다.

이웃의 소음에 끓어오르는 화를 몇 번이고 삭이면서, 누구에게도 방해 받지 않는 외딴 섬에 가 글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장 그르니에의 말처럼 모든 사람들을 “있어도 있지 않은 부재”로 여기면서, 서로 어떤 간섭도 구속도 고통도 주고받지 않는 세상에 살고 싶을 때가 종종 있다. 그런데 정작 지옥은 나다. 나라는 지옥에서부터 타자들을 격리시키고 싶다. 나는 누군가에게 지옥 같은 고통을 주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내 안에도 지옥이 열려 나는 `나`라는 타자로부터 영원히 고통 받을 것이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시인과 촌장, `가시나무`)라는 노랫말처럼, 나는 나이면서 동시에 여러 욕망들과 무의식들을 거느린, 내가 어쩔 수 없는 `타자`이기도 하다.

“햇볕에 따끈하게 데워진/ 쓰레기봉투를 열자마자/ 나는 움찔 물러섰다// 낱낱이 몸을 트는 꽃잎들/ 부패한 생선 대가리에 핀/ 한 숭어리의 흰 국화// 그들은 녹갈색과 황갈색의 진득거림을/ 말끔히 빨아먹고/ 흰 천국을 피워냈다/ 싸아한 정화의 냄새를 풍기며// 나는 미친 듯이 에프킬라를 뿌려대고/ 한 천국을 지옥으로 만들고/ 지옥을 봉했다/ 그들을 그들이 태어난/ 진득거림으로 돌려보냈다”

황인숙의 시 `움찔, 아찔`이다. 얼마 전 나는 `쓰레기봉투`같이 비열한 욕망 속에서 “흰 천국을 피워냈”다. 내 `부패한` 천국이 그에게는 지옥이어서, 그는 “에프킬라를 뿌려대”듯 나를 경멸하며 “한 천국을 지옥으로 만들고 지옥을 봉했”다. 오랜 시간 기쁘고 행복해 마치 낙원 같았던 세계가 내 진득거리는 죄악으로 지옥이 됐다. 관계를 망치는 건 천국의 나날 저 밑에서 조금씩 움트는 캄캄한 욕망들이다. 내가 만든 지옥에서 그도 나도 고통 받겠지만, 부디 나 혼자 오래 괴롭기를, 내가 후회와 반성, 부끄러움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나라는 지옥에서 그가 영영 벗어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