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희선<br /><br />숙명여대 교수·기초교양대학·정치학박사
▲ 신희선 숙명여대 교수·기초교양대학·정치학박사

20대 국회의 여성의원 수는 51명이다. 300명 전체의석 중 17.0%를 차지한다. 2대 국회에 처음으로 2명의 여성의원이 입성한 이래 20대 국회는 큰 변화를 보여주었다. 아직은 국제의원연맹 회원국의 여성의원 비율인 22.7%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여성에게 불리한 공천과 선거문화에도 불구하고 지역구에 26명의 여성의원이 선출되었다는 점은 의미가 크다. 오브리언은 “여성의 리더십 스타일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와 필요를 채워주는” 특징이 있다고 하였다. 여성의원들이 의정활동을 통해 그동안 소외되었던 사회적 약자들의 목소리를 반영해 주길 기대하는 이유다. 그러나 “밥하는 동네 아줌마”라는 발언으로 논란이 된 한 여성의원은 이러한 믿음을 배반하였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국회의원은 4년간 위임된 권력이다. 그렇다면 다양한 민의를 헤아리고 수렴하는 것이 국회의원의 본무일 것이다. 국민을 섬기는 마음으로 국회의원직을 하고 있다면, 민주노총 집회에서 학교급식 조리사·청소·경비 노동자들이 최저생계비 보장과 비정규직 철폐를 주장한 것에 대해 “미친 놈들”이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적인 대화가 몰래 녹음돼 기사가 나간 것으로 강한 유감을 표한다. 경위가 어찌됐든 부적절한 표현으로 상처를 받은 분이 계신다면 죄송하다”는 그의 사과 역시 진정성이 보이지 않는다. 설사 SBS 기자와의 사적인 통화였다고 해도, 당 대변인을 역임하고 원내 수석 부대표인 재선 국회의원에 걸맞지 않는 부박함을 보여주었다.

만인이 평등하다는 시대지만 여성들의 양극화는 심각하다. 소수의 엘리트 여성들은 남성중심 사회에서 여성인 `덕분에`수혜를 받아 권력의 사다리에 오르기도 한다. 그러나 대다수의 여성들은 여성이기 `때문에` 주변으로 밀려나거나 소외되고 배제된다. 학력과 자본과 권력이 만든 여성간의 위계화는`여성`이라는 공통의 이름으로 묶일 수 없는 갭을 만들고 있다. 서울대를 나와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로펌과 대기업 임원으로 활동하다가 국회로 입성한 그 여성의원은 학생들의 급식을 위해 밥을 하는 여성 노동자의 삶을 이해하고 있을까. 그의 발언은 피에르 부르디외의 `구별짓기`를 떠올리게 한다. 부르디외는 사회적 개인으로서 성, 학력, 소득 등이 정치적 의식과 태도를 결정하고 무의식과 습관, 문화에까지 구별짓기를 내면화한다고 하였다. 일반 서민들과 자신은 다른 존재라는 사회적 정체성으로 구별을 짓고 특권계급이라는 의식이 그 발언을 통해 확인된 것이다.

결국 “밥하는 동네 아줌마”라는 말은 평소 어떤 시각을 갖고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밥`을 하는 노동을 아무나 하는 하찮은 일로 여기는 신흥귀족으로 그는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 무더위에도 저임금을 견디며 학교 급식 일을 하면서 조금이라도 잘 살아보려는 서민들의 애환에 전혀 공감하지 못한 이유다. 또한 `동네`는 그가 몸담고 있는 여의도 국회의사당과는 전혀 다른 곳이다. 세련된 의상을 입고 의례적인 미소를 나누는 곳이 아닌, 동네는 허름한 일상과 고단한 노동이 있는 삶의 공간이다. 가족을 위해 손에 물이 마를 날이 없이 헌신하고 희생하는 아줌마들의 거친 손을 따스하게 잡아주지는 못할망정 “밥이나 하는 동네 아줌마”로 폄하하는 그의 시선이 불편하다.

말은 그 사람의 세계이다. 그가 사용하는 말이 곧 인격과 가치를 드러낸다. 우리는 화려하고 세련된 달변의 국회의원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진심을 담고 있다면 설사 거친 말이라고 해도 상대의 마음을 다치게 하지 않는다. 박노해 시인은 “그 어떤 위대한 일도 밥 한 그릇에서 시작된다”고 하였다. 이제 국회의원이 되었음에, 자신이 대표하려는 국민이 누구인지, 나아가 여성의원으로서 소외된 여성들을 위해 어떤 책무를 품고 있는지 스스로 물어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