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동찬<br /><br />김천대 교수
▲ 김동찬 김천대 교수

자유한국당의 혁신위원장으로 류석춘 연세대 교수가 위촉되었다. 류석춘 교수는 이승만 연구원 원장을 역임한 바 있다. 우남 이승만(1875~1965)은 조선 왕조가 기존 대륙세력인 중국 영향력 하에서 벗어나 해양세력이 밀려들어오는 새로운 문명의 격변기인 1875년(3월 26일)에 태어났다. 조선 왕조는 그때까지 추구해 오던 중국 중심의 대륙 문명권 영향 하에 그대로 순응하며 살아남느냐, 아니면 서양 중심의, 그리고 새롭게 부상하는 일본과 미국이 포함된 해양문명권에 새로이 편입되느냐의 중대한 운명의 갈림길에 놓여진 시기였다. 다시 말해, 조선은 `문명의 전환`이라는 소용돌이로 빠져들기 시작한 때였다.

독립협회의 개혁운동에 적극 참여한 이승만은 1899년 1월 고종 황제를 폐위시키고, 새로운 혁신정부(국민주권국가)를 수립해, 급진적인 정치개혁을 단행하기 위한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한성감옥에서 5년 7개월 동안 수감생활을 하게 된다. 이승만은 감옥에서 `자유의 종교`인 기독교로 개종하고, 기독교가 건국 이념인 미국에 대한 강한 긍정적 신념을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기독교 수용과 미국이 한국의 독립과 번영을 위해 `필수적`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이승만의 미국에 대한 인식은 배재학당과 한성감옥에서의 생활 그리고 독립신문을 통한 호의적인 미국관을 매우 긍정적으로 수용하게 되었다. 배재학당을 졸업한 이승만은 한글신문인 매일신문과 제국신문을 발간하면서 언론인으로 약소국 조선의 구국을 위한 국민계몽에 나섰고 개화파 지식인들이 주도하는 독립협회에도 적극적으로 활동을 해 나아갔다. 29세의 청년 이승만은 당시 한국사회에서 최고의 지식인 중의 한사람으로 거듭 태어나고 있었다. 출옥한 후 3개월 만에 이승만은 주변의 선교사의 권유로 미국인과 미국사회를 본격적으로 관찰·연구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갖게 된다. 일찍이 한성감옥에서 개신교를 통해 인접 제국 중국과 러시아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했던 이승만의 지정학적 인식은 개신교를 통해 부국 강병해 질 수 있다고 보여 졌던 미국에 대한 우호적 인식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1895년 4월 이승만은 미국의 감리교선교사인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가 설립한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서양(미국)문명인 신교육을 받게 되었다. 이승만과 미국의 본격적인 `만남`이 시작되었고, 그 후 그의 생애는 미국을 중심으로 삼아 전개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승만은 서양의 기독교 국가 시민들이 정치적 자유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그것은 실로 `너무나 혁명적이고 충격적인` 사건이었다고 이승만은 후일 고백하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정치 지도자의 안보 외교적 실천 능력은 낡고 시대착오적인 국제질서를 타파하고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는 혁명가의 길과 불필요한 전쟁을 방지하면서 안보 외교 정책을 국제적 상황 변화에 분별력 있게 적응시키는 현상 관리자의 길로 나뉠 수 있다. 따라서 외교 안보의 정책적 지도력은 자기 시대에 당연하게 요구되는 사고의 틀을 극복하고 창의력을 실현시킬 수 있는 지성적 용기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정치 지도자의 바람직한 자질은 자신의 비전이나 정책적 선택을 국내외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 지성적 능력과 결연한 의지 그리고 그것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실천적 용기에 달려 있다.

우남 이승만의 지도력은 마키아벨리가 강조한 선견지명의 지적 능력과 클라우제비츠가 강조한 실천적 능력으로 집약될 수 있다. 이승만은 `매우 탁월한` 인간이었다. 이승만은 정치적 야심가였으며 그러한 정치적 야심이 원동력이 되어 자유 대한민국 건국이 이루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