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차돈 순교와 불교왕국의 태동 ⑨

▲ 이차돈과 법흥왕은 신라 사람들이 `신령이 깃든 숲`으로 믿던 천경림에 사찰을 세우려고 했다. 이는 당연한 수순처럼 논란과 혼란을 불렀다. 맑은 물이 울울창창한 소나무와 버드나무를 비추던 6세기 서라벌의 천경림. 그 안에 모습을 드러낸 사찰을 상상해 그렸다. <br /><br />삽화/이건욱
▲ 이차돈과 법흥왕은 신라 사람들이 `신령이 깃든 숲`으로 믿던 천경림에 사찰을 세우려고 했다. 이는 당연한 수순처럼 논란과 혼란을 불렀다. 맑은 물이 울울창창한 소나무와 버드나무를 비추던 6세기 서라벌의 천경림. 그 안에 모습을 드러낸 사찰을 상상해 그렸다. 삽화/이건욱

`경주의 상징`이라고도 불리는 소나무와 삼단 같은 머리채를 드리운 미인 형상의 버드나무가 초여름 빛나는 햇살 아래 푸름을 더해가고 있었다. 그 곁으로 폭이 좁은 강이 무심하게 흘렀다. 2017년 오늘이나 법흥왕과 이차돈이 살았던 6세기 초반이나 크게 변하지 않았을 풍경.

지금으로부터 1천500여 년 전. 서라벌을 가로지르는 남천(南川)의 북쪽 방향 언덕엔 신라인들이 신성하게 여기던 숲이 있었다. 이름하여 천경림(天鏡林).

소나무와 버드나무가 우거진 그 숲엔 고고학자와 역사학자의 오랜 조사와 연구로도 아직 온전히 밝혀지지 않은 여러 비밀이 존재한다.

샤머니즘(Shamanism·원시 종교의 한 형태로 주술사가 초자연적 존재와의 교류를 통해 예언 따위를 함)과 애니미즘(Animism·세상 모든 사물에 영혼이 깃들었다고 믿는 원시 신앙)을 신봉하는 이들, 풍류도(風流道·신라 귀족층 젊은이들이 몸과 마음을 수련하던 조직)의 청년들, 여기에 이심전심으로 불심(佛心)을 추종하던 이차돈과 법흥왕.

천경림은 이처럼 다양한 정치·종교적 프리즘을 가진 각각의 세력이 충돌하던 `혼란의 숲`이기도 했다. 그 충돌과 혼란이 내부에서 외부로 돌출돼 `역사적 사건`으로 드러난 게 바로 527년 이차돈의 순교다. 죽음의 순간 붉은 피가 아닌 흰 젖이 용출하고, 칼에 잘려 날아간 머리가 백률사 대숲에 떨어졌다는.

▲ 법흥왕과 이차돈, 천경림에 사찰을 세우려 하다

`해동고승전`과 `삼국유사` 등의 고대 문헌과 현대의 신라역사·불교에 관한 연구논문들은 공통적으로 이야기한다.

`이차돈이 죽어야 했던 이유`는 그가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충돌하는 공간인 천경림에 흥륜사(興輪寺)라는 절을 지으려 했기 때문이라고.

세명대학교 이창식 교수는 그의 논문 `이차돈 유산 가치와 현대적 계승`에서 천경림의 당대 위상과 흥륜사의 축조, 그리고 이차돈의 순교가 신라사회에 미친 영향을 아래와 같이 서술하고 있다.

“이차돈이 천경림에 짓던 사찰은 흥륜사인데, 진흥왕 5년(544년)에 이르러 완공된다. 흥륜사가 들어선 천경림은 신림(神林·신성불가침 지역)의 장소인데 신라인들이 경애하던 숲이자, 칠처가람(七處伽) 터의 한 곳이다. 이차돈은 신라에 불교를 뿌리내리고자 자신의 한 몸을 미련 없이 버렸다.

`화엄경(華嚴經)`의 `꽃과 강을 버릴 때 열매와 바다를 본다`는 진리를 몸소 증거한 경우다. 이차돈의 희생적 이타행(利他行)은 통일신라를 거치며 화려한 불교문화로 승화되었고, 부처의 가르침은 신라정신, 민족정신의 근간이 되었다. 흥륜사 역시 기념비, 추모제 불사(佛事)에서 벗어나 상생불교의 대표 산실로 부각됐다.”

이창식 교수의 결과론적 진술에 앞서 말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천경림에 절을 지은 것이 이차돈이 죽음을 피할 수 없었던 이유가 됐다`는 앞서의 언급은 학자들 간에 이견이 별로 없다. 그러나, 절을 지은 이유가 무엇일까에 관해서는 3가지의 다른 견해가 존재한다.

그 견해 중 첫 번째는 `법흥왕의 명령으로 이차돈이 흥륜사 축조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스물한 살에 불과했던 이차돈이 `왕권강화를 통한 신라사회의 변혁`을 꿈꿨던 법흥왕에게 이용당했다는 가설에 가 닿는다. 이는 장편 구도소설 `만다라`의 작가 김성동의 견해이기도 하다.

두 번째 학설은 `이차돈이 독자적으로 천경림 안에 사찰을 지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펼치는 역사학자들은 이차돈을 “명민함과 종교적 신념을 바탕으로 목숨과 신라의 불교 공인을 맞바꿀 만한 배짱을 지녔었다”고 평가한다.

마지막으로 세간을 떠도는 학설 중 하나는 `천경림에서 공존하던 샤머니즘과 애니미즘, 풍류도를 제압하기 위해 흥륜사를 지으려고 했던 것은 법흥왕과 이차돈의 밀약(密約)이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이 설득력이 얻기 위해서는 보다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하는 게 필요해 보인다.

▲ 소나무는 경주의 상징이기도 하다. 옛날과 오늘날의 문헌들은 모두 천경림을 “소나무와 버드나무가 흐드러진 물가”라고 쓰고 있다. 원시의 풍광을 간직한 경주 남천 일대. <br /><br />사진/이용선기자
▲ 소나무는 경주의 상징이기도 하다. 옛날과 오늘날의 문헌들은 모두 천경림을 “소나무와 버드나무가 흐드러진 물가”라고 쓰고 있다. 원시의 풍광을 간직한 경주 남천 일대. 사진/이용선기자

▲ 비밀의 숲 천경림에서 떠올린 시인 `이지도르 뒤카스`

한양대학교 이도흠 교수는 신라가 불교를 받아들이기 전 천경림의 `주인 중 하나`였던 풍류도에 관해 자타가 공인하는 전문가다.

이 교수는 6세기 초반 천경림에 흥륜사를 지으려했던 시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한국고대사탐구학회가 발행한 논문 `이차돈의 가계와 신라의 불교 수용`을 통해서다.

“법흥왕은 어느 정도 왕권이 강화되었다고 판단되는 재위 14년(527년)에 풍류도의 세력을 누르기 위해 이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성소(聖所)인 천경림에 절을 짓고자 했다.

이는 오늘날의 입장에서 보면 조계사 안에 교회를 짓는 것처럼 충격적인 일이다. 풍류도의 반대는 당연했다. 하지만, 누구건 왕권에 맞서기는 어려운 일. 변수는 명분과 백성들의 여론이었다.”

이도흠 교수의 이러한 진술은 논란이 계속돼온 이차돈의 죽음이 `순교`였는지 `밀약에 의한 처형`이었는지를 유추해볼 수 있는 근거의 하나가 된다.

법흥왕 절체절명의 프로젝트인 `왕권강화`의 가장 큰 걸림돌은 풍류도의 주류세력과 원시적 믿음 체계를 신봉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을 어떻게 설득하고 제압할 것인지는 법흥왕이 안고 있던 가장 어렵고 힘든 숙제였다.

이도흠 교수 역시 이를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당시 법흥왕의 딜레마(dilemma)를 이렇게 표현한다.

“흥륜사 창건을 없던 일로 하게 되면 왕의 권위를 상실함은 물론 불교 공인은 먼 훗날로 미뤄지게 된다. 반대로 흥륜사 창건을 강행해 반대세력을 처단하게 되면 짐승의 생명도 죽이지 않으려던 스스로의 불심을 버려야 했다.”

이 위기의 상황에서 법흥왕은 `나이 어린 도반(道伴)` 이차돈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렇다면, 법흥왕은 자신의 `프로젝트`를 위해 이차돈을 죽인 것일까? 그게 아니면, 이차돈 스스로 법흥왕에게 불교 공인을 위한 죽음을 청했던 것일까?

인간은 답을 알지 못하지만, 천경림의 소나무와 버드나무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무들은 말이 없었다.

지키기로 약속한 비밀에 영원히 입을 닫을 줄 아는 대장부처럼.

고뇌와 번민을 안고 이차돈과 법흥왕이 서성였을 천경림을 1천500년의 세월이 흐른 뒤 기자 역시 오래 서성였다. 그때였다.

요절한 우루과이 출신 시인 이지도르 뒤카스(Isidore Ducasse·1846~1870)의 짧은 시 `나무`가 떠오른 것은.

`나무는 자신의 위대함을 모른다.`

▲ 1909년 경주 송화산 금산재에서 발견된 석조 반가사유상. 이 부처상은 이차돈처럼 머리가 잘려나갔다. 반가사유상의 머리는 어디에서 고고학자들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을까?
▲ 1909년 경주 송화산 금산재에서 발견된 석조 반가사유상. 이 부처상은 이차돈처럼 머리가 잘려나갔다. 반가사유상의 머리는 어디에서 고고학자들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을까?

송화산 `반가사유상`의 머리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반달리즘(Vandalism)이란 정치·경제·종교적 이유 등으로 문화예술과 관련된 유물을 파괴하는 행위를 지칭하는 단어다.

“역사상 최악의 반달리즘”이라 비판받았던 건 `탈레반`으로 불리는 이슬람근본주의자들의 `바미안 석불(石佛) 폭파`였다.

아프가니스탄 중부에 위치한 바미안 석굴사원. 높이가 자그마치 53m에 이르는 불상이 우뚝 서 있던 이곳은 인도와 페르시아의 예술양식이 접목된 인류 최고의 문화유산 중 하나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탈레반은 이 석굴사원이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수십 년에 걸쳐 총과 폭탄을 이용해 불상을 포함한 유물의 대부분을 부숴버렸다.

이는 단순한 종교적 상징물의 파괴가 아닌, 인류의 정신사에 대한 심각한 모욕으로 받아들여졌다.

지난봄. 국립경주박물관 전시장에서 김유신 장군 묘 인근 경주 송화산 금산재(金山齋)에서 발견된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양 다리를 수평으로 얹고 앉아 손을 얼굴에 댄 채 생각에 잠긴 부처상)과 만났다.

부드러운 곡선과 유려한 조형 양식이 보는 이를 매혹시키는 아름다운 조각품이었다.

그런데, 이 반가사유상에는 머리와 팔이 없었다. 그때 기자의 눈앞으로 `반달리즘`이란 단어가 스치듯 흘러갔다.

여러 개가 아닌 하나의 돌을 이용해 만들어진 금산재 반가사유상은 연꽃 위에 사뿐히 올린 발가락과 목에 건 목걸이까지 섬세하게 표현해낸 것으로 보아 빼어난 신라 석공(石工)의 작품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조각의 재료 중에서도 가장 다루기 어렵다고 알려진 화강암을 이처럼 예술적으로 매끄럽게 깎아내 부처상을 만든 시기는 6세기 말에서 7세기 초반이라는 게 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다.

신라에 불교를 공인한 법흥왕과 순교자 이차돈이 막을 연 `불교왕국의 태동` 시기에 만들어졌다는 것.

`금산재 석조 반가사유상`은 생명이 없는 바위에서 생명력으로 꿈틀거리는 연꽃이 피어나 깨달음을 얻고자 고뇌하는 부처의 모습을 감싸듯 받치고 있는 걸 형상화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신념과 죽음 사이에서 갈등해야 했던 스물한 살 청년 이차돈의 고뇌와도 맥이 닿아 있다.

앞서도 의문을 제기했지만 “금산재 반가사유상의 머리는 언제 어떻게 사라졌을까?”

관련 학문을 연구해온 역사학자에 따라 주장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비등하고 있다.

“불교가 주류였던 고려시대 이후 조선의 숭유억불(崇儒抑佛·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압함) 정책이 만든 비극”이란 학설이 있고, “임진왜란 때 승병(僧兵)들의 용기를 꺾으려고 일본 병사들이 잘랐다”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몽골 군대가 불상을 파괴하고 다녔다는 문헌 기록 또한 일부 남아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어떤 게 정확한 답인지 누구도 알지 못한다. 이처럼 역사란 수많은 의문과 질문을 부르는 흥미롭고도 크나큰 수수께끼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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