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차돈 순교와 불교왕국의 태동 ⑦

▲ 이차돈과 `비밀스러운 프로젝트`를 진행해 신라가 불교를 받아들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법흥왕. 그의 능은 경북 경주시 효현동에 있다.
▲ 이차돈과 `비밀스러운 프로젝트`를 진행해 신라가 불교를 받아들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법흥왕. 그의 능은 경북 경주시 효현동에 있다.

때로 역사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유사한 인간형을 탄생시킨다. `대의를 위한 희생` 또는, `목숨을 건 결단`이라는 키워드를 놓고 보면 `불교 공인`의 문을 연 신라 최초의 순교자 이차돈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정치가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1918~2013)는 여러 부분이 닮았다.

이차돈이 “흩어진 신라의 국력을 하나로 모아 나라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불교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신념 때문에 생명을 잃었다면, 넬슨 만델라는 남아공에서 일상적으로 행해지던 극악한 인종차별 정책에 저항하며 흑인과 백인의 평등한 권리를 주장했다는 이유로 27년간 감옥살이를 했다.

이차돈은 자신의 죽음으로 신라가 중앙집권 체제를 갖춘 강력한 왕국으로 발전하는 동시에 삼국을 통일시킬 기틀을 만들었고, 27년에 걸친 만델라의 수난과 고통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인권운동의 획기적 계기를 마련한 국가`로 인정받게 했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들의 자기희생. 세상은 그들의 이름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으로 흠모와 존경의 마음을 드러낸다.

이미 몇 년 전 만델라는 사망했지만, 아직도 남아공의 흑인들은 그를 떠올릴 때면 눈물부터 보인다고 한다. 또한, 그가 흑인으로서는 최초로 대통령을 맡은 이후 그 나라의 인권 상황과 약자에 대한 복지는 느린 속도지만 분명 개선의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이 학자들의 일관된 평가다. 만델라가 활동한 시기보다 1500여 년 앞서 일어난 `이차돈의 순교` 또한 신라사회에 긍정적 영향을 적지 않게 끼쳤다.

이차돈이 절대적으로 신뢰했던 법흥왕(재위 514~540)과 법흥왕의 조카인 진흥왕(재위 540~576), 진흥왕의 차남인 진지왕(재위 576~579)으로 이어지는 65년의 세월은 영광과 시련 속에서 신라가 제대로 된 왕조국가의 기틀을 갖추고, 발전의 방향을 진지하게 모색하던 시기였다.
 

▲ 진흥왕릉은 경주시 서악동에 자리해 있다. 진흥왕은 재위 시절 신라의 영토를 넓히고, 정치 시스템을 효율적으로 개선하고자 노력했다.
▲ 진흥왕릉은 경주시 서악동에 자리해 있다. 진흥왕은 재위 시절 신라의 영토를 넓히고, 정치 시스템을 효율적으로 개선하고자 노력했다.

▲ 법흥왕, 불국정토(佛國淨土)의 출발을 알리다

목숨을 담보로 한 법흥왕과 이차돈의 `비밀스러운 프로젝트`로 인해 527년(이차돈이 순교한 해) 이후 신라사회는 획기적인 변화를 겪는다. 보각국사 일연이 쓴 `삼국유사`는 그 변화를 아래와 같은 시적(詩的)인 문장으로 기록하고 있다.

“절들은 별처럼 벌여 있고, 탑들은 기러기 행렬처럼 늘어섰다. 법당을 세우고 범종을 매달았다. 용상 같은 승려의 무리가 세상의 복전이 되었고, 대소승의 불법이 신라의 자비로운 구름이 되었다. 타방의 보살이 세상에 출현하고 서역의 명승들이 이 땅에 강림하니 이로 인해 삼한을 병합해 한 나라가 됐다.”

위와 같은 서술은 법흥왕과 이차돈이 도래시킨 `불교융성시대`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 동국대 강석근 교수의 논문 `백률사 설화와 제영에 대한 연구`는 후대 숭배자들에 의해 이차돈이 `부활`의 형태를 드러냄으로써 신격화되는 과정까지를 담고 있다. 이런 대목이다.

“이차돈의 재생을 바라는 후대인들의 염원과 조선 후기에 생성된 백률송순(柏栗松筍·이차돈의 순교를 기리기 위해 지은 사찰 백률사 인근의 소나무는 가지를 잘라도 다시 생겨난다는 뜻) 개념 사이에는 깊은 연관성이 있다고 필자는 판단한다.”

불교라는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통해 중앙집권적 왕조의 초석을 깔았던 법흥왕. 거리와 산마다 사찰이 생겨나고, 승려들이 거리낌 없이 포교 활동을 하며, 아침과 저녁마다 범종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는 나라로 변모한 신라.

법흥왕이 죽음을 앞두고 아내와 함께 승려가 돼 궁궐이 아닌 절을 향했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 듯하다. 이 같은 불교문화의 빠른 확산, 그 배후에는 이차돈의 순교가 있었다.

▲ 진흥왕, 영토를 넓히고 정치체제를 정비하다

법흥왕에 이어 신라의 24대 왕이 되는 진흥왕은 불과 일곱 살에 왕위에 오른다. 이후 12년간의 섭정(攝政) 기간을 거쳐 열아홉 살이 되었을 때부터 본격적인 통치를 시작한 진흥왕은 신라의 영토를 한강 일대와 함경도 지역까지 넓혔다.

역사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중·고교시절 수업 시간에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와 단양적성비(丹陽赤城碑)에 관한 이야기를 한 번쯤은 들었을 것이다. 이 비석들은 진흥왕 통치 당시 신라의 국토 확장 의지와 관직제도를 짐작하게 해주는 소중한 사료(史料)다.

이차돈과 법흥왕이 그 토대를 닦아놓은 `왕권 강화 국가` 신라에서 진흥왕은 차지한 영토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 땅에 관한 지배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여러 차례에 걸쳐 지방의 행정조직을 개편하기도 한 것. 다수의 역사서는 진흥왕 16년인 555년 경남 창녕 지역에 완산주(完山州)가 설치됐고, 이듬해인 556년에는 비열홀주(比列忽州·함경남도 안변)가 설치됐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는 기원전 4세기 알렉산드로스 3세가 자신이 정복한 지역을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라 명명한 후, 효율적인 사회통치 시스템을 마련하고 자신을 대행할 정치권력을 세웠던 형태와 유사하다. 이처럼 역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유사하게 반복되고 있다.
 

▲ 이차돈의 순교를 통해 불교를 공인한 법흥왕과 영토 확장에 공을 세운 법흥왕의 조카 진흥왕, 역사적 평가가 엇갈리는 진지왕. 이들이 통치한 6세기는 신라가 불교왕국으로 성장하는 기틀을 다진 시기다. 이 세 명의 왕이 함께 자리한 모습을 그렸다. 물론 세 왕의 뒤에는 `이차돈`과 `불교`가 있었다. <br /><br />삽화/이건욱
▲ 이차돈의 순교를 통해 불교를 공인한 법흥왕과 영토 확장에 공을 세운 법흥왕의 조카 진흥왕, 역사적 평가가 엇갈리는 진지왕. 이들이 통치한 6세기는 신라가 불교왕국으로 성장하는 기틀을 다진 시기다. 이 세 명의 왕이 함께 자리한 모습을 그렸다. 물론 세 왕의 뒤에는 `이차돈`과 `불교`가 있었다. 삽화/이건욱

▲ 진지왕, 사학계의 평가는 엇갈리지만…

법흥왕과 진흥왕에 비해 재위 기간이 3년으로 매우 짧았던 진지왕(신라 25대 왕)은 역사학계의 평가가 엇갈리는 군주다. 경상북도가 발간한 `신라를 빛낸 인물들`에서 진지왕은 후한 평가를 얻고 있지 못하다. “정치를 제대로 돌보지 않아 사회 혼란을 초래했다”거나, “국민들의 결의에 따라 폐위됐다”는 등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

하지만,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는 반대의 견해를 내놓는 목소리도 함께 들어야 한다. 일부 역사가들은 진지왕이 “신라 국경을 침탈한 백제군을 일선군(一善郡·경북 구미 일원)에서 물리쳤고, 성을 축조해 외부의 침입에 대비했다”고 말한다. 또한, “진(陳)나라에 사신을 파견하는 등 외교에도 힘썼다”는 옹호론을 펼치기도 한다.

어쨌건 법흥왕에서 진흥왕, 진지왕으로 이어지는 6세기는 종교인 동시에 정치 이데올로기였던 불교를 통해 신라가 중앙집권국가의 형태를 갖춰나간 시대였음은 부정하기 어려울 듯하다.
 

▲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된 신라시대 호석 속 원숭이의 탁본. 신라인들은 장수와 풍요를 상징했던 원숭이를 신비롭게 생각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된 신라시대 호석 속 원숭이의 탁본. 신라인들은 장수와 풍요를 상징했던 원숭이를 신비롭게 생각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차돈이 살던 신라에
원숭이가 있었을까?

2006년 여름. 인도를 여행했을 때다.

마을까지 내려와 자연스레 인간들과 함께 살아가는 수많은 원숭이를 보고 크게 놀란 적이 있다. 인도 사람들은 원숭이와 어울리는 걸 싫어하지 않는 듯했다. 심지어 원숭이 형상을 한 힌두교의 신(神) 중 하나인 하누만(Hanuman)은 전해오는 이야기 속 용맹함으로 숭배까지 받고 있었다.

비단 인도만이 아니다. 아시아 여러 국가에서 원숭이는 `신성(神性)` 유사한 걸 부여받아 보호되고 있다. 이는 원숭이가 인간의 모습과 가장 닮았기 때문일까?

삼장 법사를 모시고 천축으로 불전(佛典)을 가지러 가는 손오공은 세상 사람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원숭이인 동시에 소설 `서유기`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태국의 치앙라이와 푸껫 등엔 수천 마리의 원숭이가 주인 노릇을 하는 사원도 있다.

그렇다면, 이차돈과 법흥왕이 살았던 6세기 신라에도 원숭이가 있었을까? 자그마치 1500여 년 전을 향해 던지는 질문이니 명확한 답변이 나올 수는 없다. 그러나, 추측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일연의 `삼국유사`는 이차돈의 순교와 법흥왕의 행적 등 신라의 역사를 서술한 책이다. 여기에 짤막하게나마 원숭이와 관련된 기록이 등장한다. 이런 대목이다.

“이차돈의 떨어진 목에서 붉은 피가 아닌 흰 젖이 솟았다. 이때 주위 산의 큰 소나무가 저절로 부러지고, 원숭이가 떼를 지어 몰려다니며 울었다.”

일연의 기록만으로 보자면 이차돈의 순교가 있던 527년 신라엔 원숭이가 살았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삼국유사` 외의 다른 고문헌(古文獻)에도 “법흥왕은 사신을 보내는 등 중국과 활발한 교류를 진행했다”는 이야기가 전하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중국 남부의 원숭이들을 누군가가 신라로 가져왔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신라 역사를 연구하는 일부 학자들은 다른 견해를 내놓기도 한다.

“한국에는 원숭이가 살지 않았다. 신라 사람들은 전해 듣거나 그림에서 본 원숭이를 상상했을 뿐”이라는 것.

이는 타임머신이 만들어져야 명확한 사실관계가 파악될 수 있는 성질의 논쟁이기에 어느 의견이 옳은 것인지 지금으로선 판단을 유보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신라인들이 원숭이를 신성시하고, 야박하게 대하지 않았다는 것은 유물이 증명하고 있다. 원숭이가 가장 흔하게 등장하는 신라시대 유물은 왕과 귀족의 고분을 장식한 호석(護石·무덤 둘레에 돌려 쌓은 돌)이다. 십이지신(十二支神) 중 하나인 원숭이는 다른 동물들과 함께 성덕왕릉, 원성왕릉, 흥덕왕릉, 진덕여왕릉 등을 호위하고 있다. 늠름한 장군의 모습으로 의인화 되어.

고귀한 신분의 왕이 묻힌 묘지를 지키는 모습으로 형상화된 신라의 원숭이. 그 호석들을 보고 있으면 의문은 더 커진다. “이차돈이 살던 시대에 원숭이는 실재했을까? 아니면, 석공들의 상상력 속에 존재한 것일까?”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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