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병철<br /><br />시인
▲ 이병철 시인

“물 좀 주소. 물 좀 주소. 목마르요. 물 좀 주소. 그 비만 온다면 나는 다시 일어나리.” 한대수의 `물 좀 주소`다. 요즘 밖에 나가 땡볕 아래를 걸으면서 주술처럼 이 노래를 흥얼거린다. 흥에 겨워 부르는 것이 아니므로 칭얼거리는 게 맞겠다. 제발 비 좀 오라고, 징징대며 보채고 있다.

1973년 이후 두 번째로 극심한 가뭄이라고 한다. 5월 말까지 전국 누적 강수량이 가장 적었던 해는 2000년인데, 그때보다 고작 8mm 더 내렸다. 평년 대비 절반 수준 강수량 탓에 전국의 강과 저수지, 논밭이 타들어간다. 대형 호수인 충남 예산 예당저수지 낚시 좌대들이 사막 같은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눈으로 보면서도 믿어지지 않는 광경이다. 비를 내리는 저기압보다 고기압이 강세를 보이는 것이 봄 가뭄의 원인이다. 본격적인 장마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불볕더위와 가뭄의 나날이 계속될 것이다. 싫다. 정말 싫다. 시원한 폭우가 쏟아졌으면 좋겠다. 우산도 없이 그 비 다 맞으면서 동네 한 바퀴 걸을 것이다.

지난해 늦여름에는 지면을 통해 덥다고 칭얼거렸더니 이튿날 바로 가을이 왔다. 봄꽃 구경 가라고 부추기는 글 썼더니 돌풍을 동반한 장대비가 내려 꽃 다 져버린 일도 있다. 가뭄 이야기를 괜히 하는 것이 아니다. 이번 글은 일종의 `기우제`인 셈이다.

“마르케스의 소설 `백 년 동안의 고독`에 보면 4년 11개월 이틀 동안이나 비가 오던데, 당신 능력은 인간의 상상 그 이상 아니던가요? 일주일만이라도 좀 어떻게 안 될까요?”

비가 내리지 않아 농민들의 피해가 이만저만 아니다. 논에 물을 댈 수 없으니 모내기도 못하는 상황이다. 그 와중에 고온현상은 계속돼 농민들 약 올리듯 대구와 광주에선 열대과일인 바나나가 열리기까지 했다. 땅이 말라서 쩍쩍 갈라지는 것도 문제지만 폭염과 건조한 대기는 사람들의 마음을 성마르게 한다. 아프리카 해변의 대낮, 끓는 기름을 정수리에 붓는 듯한 태양에 짜증이 솟구쳐 아랍인을 살해한 `이방인`의 뫼르소처럼 말이다.

경남 양산에서 한 40대 남성이 아파트 외벽 작업자의 휴대폰 음악 소리가 시끄럽다며 옥상으로 올라가 작업 밧줄을 끊었다. 다섯 아이를 둔 가장은 12층 높이에서 추락해 목숨을 잃었다. 아침잠을 방해받는다며 분노를 조절 못해 저지른 충동적인 살인이다. 충북 충주에서도 한 50대 남성이 인터넷 수리를 하러 방문한 기사를 흉기로 살해했다. 인터넷이 느리다는 이유로 그랬다. 피해자는 노모와 아내, 대학생 두 자녀를 둔 가장이었다.

섭씨 40도가 넘어 온 세상이 이글거려도, 1년 내내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더라도 제 분에 날뛰어 죄 없는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 땡볕과 가뭄은 극악무도한 범죄의 이유가 될 수 없다. 다만 점차 열대화, 사막화되는 기후가 우리 사회에 내면화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날씨와 사람의 심리는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고온현상으로 꽃들은 기다림 없이 서둘러 피었다가 급하게 져버린다. `균형`의 계절인 봄과 가을은 점점 사라지고 폭염과 한파가 두드러진다. 일교차는 점차 커지고, 맑은 하늘 보기가 어렵다. 우리나라 사람들 성정도 기후처럼 변하는 중이다. 인내가 사라지고, 이해와 배려를 바탕으로 한 중용 대신 양극화만 극심해진다. 변덕스런 일교차처럼 조울증과 정신분열증이 횡행한다. 마음에 `불신`과 `의심`의 미세먼지가 가득 끼어 있다. 분노는 금방 부글부글 끓고, 비난은 집중호우처럼 거세며, 타인을 향한 시선은 혹한의 칼바람처럼 냉혹하기만 하다.

땅에도, 마음에도 단비가 필요하다. 열기를 식히고, 건조한 곳을 촉촉하게 적셔줄 비가 절실하다. 바싹 말라 뒤틀리고 갈라진 자리마다 스며들어 부드럽게 쓰다듬어줄 비를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