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희룡<br /><br />서예가
▲ 강희룡 서예가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킨 후 은나라의 중신이었던 기자를 찾아가 백성을 안정시키는 통치방략에 대해 자문을 구했을 때, 기자는 홍범구주(洪範九疇)라는 아주 상세한 지략을 내놓는다. 이 홍범조는 상서(尙書) 즉 서경에 실려 있으며 제5조인 황극설에 `무편무당왕도탕탕 무당무편왕도평평`이라 기록하고 있다. 이 말은 `패거리를 만들지 않고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면 통치의 길은 평탄하다`는 뜻으로 `탕평`을 설명한 것이다.

조선에서는 숙종 9년 박세채(1631~1695)가 처음 탕평이라는 용어를 제시했으며 신임옥사의 와중에서 왕위에 올라 당쟁의 폐단을 뼈저리게 겪은 영조가 1724년 즉위하자 당쟁의 폐단을 지적하고 탕평의 필요를 역설하는 교서를 내려 탕평책의 의지를 밝혔다. 영조는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되어 극한대립으로 인해 탕평책으로 붕당의 갈등을 완화해 안정적인 정국을 이끌어 가고자 했다.

임성주(1711~1788)의 녹문집에 `송문흠에게 보낸 편지`에 수록된 내용은 당시 영조의 탕평을 비판하는 상소에 넣을 조목으로 작성된 글이다. `근래 탕평 두 글자는 바로 저잣거리의 노랫가락이 되고 말았습니다. 소모는 아이, 말 끄는 군졸이라도 말이 조금이라도 애매하여 이쪽저쪽 다 옳다 하거나, 둘 다 그르다고 하면 곧장 탕평이라고 지목해 웃음거리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옷에도, 띠에도, 부채에도 탕평이 있으니 지극히 우매한 백성의 소견이 참으로 정곡을 꿰뚫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저절로 하나의 바른 공론(公論)이 생긴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차마 어떻게 이 삼백 년 종묘사직을 웃음거리로 만드신단 말입니까.`(하략)

탕평채라는 음식이 있다. 각색의 묵을 섞어서 버무린 것으로 속설에 의하면 영조의 탕평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음식이라고 한다. 그런데 당시에 탕평채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탕평옷, 탕평띠, 탕평갓, 심지어는 탕평부채라는 말도 있었다. 한눈에 알 수 있듯이 탕평을 조롱하는 말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애매모호한 것은 탕평이며 그래서 조금만 애매모호하면 모조리 가져다 탕평이라고 이름을 붙인다는 것이다.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탕평을 반대하고 있는 것은 물론 심지어는 애들까지 조롱하고 있는 것이다. 왕이 국시로 내놓은 것을 신료들이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저잣거리 애들까지 조롱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영조의 탕평정국 말기에는 당쟁의 폐단을 확대시키기도 했던 척신정치가 부활했고, 척신들의 이해관계나 이합집산의 과정에서 왕위계승권자의 위치도 함께 흔들리는 등의 폐해가 다시 나타났으나 이 점을 군주인 정조는 깊게 인식하고 그러한 정국운영은 사대부 뿐 아니라 일반 백성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도리이기도 한 `세도` 전체를 타락시켰다고 비판하였다. 영조는 완론탕평으로 붕당자체를 인정하지 않았고 문제를 완만하게 해결해보려고 한 반면, 정조는 준론탕평으로 붕당을 인정하고 시비를 가리는 탕평책을 펼쳤던 것이다.

주자는 논어 `위정편` 첫머리에서 정(政)이란 바르다(正)는 말로, 바르지 않는 것을 바로 잡는다는 것이다. 여기에 옳고 그름은 절충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며 오직 판단을 통해서만 해소될 수 있다. 정치 자체가 시비를 가르는 행위이다 보니 분파의 형성은 필연적이다. 전통시대 정치행위란 시비(是非), 정사(正邪), 충역(忠逆)의 구분을 명확히 하는 그 자체로 한편에 설 수밖에 없었던 역사를 가진 우리가 타협과 절충을 중요시 않고 끝없이 시비에 빠져드는 모습이 이해도 된다. 오늘날 민주정치의 관료임명에도 탕평인사가 빠지지 않고 나온다. 여야가 서로를 존중하고 소통한다면 국가의 발전과 국민 삶의 질은 나아지고 민주주의도 더욱 성숙해지리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