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병철<br /><br />시인
▲ 이병철 시인

살면서 연인 외에 다른 사람에게 안겨본 경험이 거의 없다. 안기기엔 부담스러운 `등빨`을 지닌 까닭일까. 안아주기에 특화된 넓은 가슴둘레를 가졌으면서 타인을 안아준 적도 드물다. 교회 수련회나 대학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같은 데서 몇 번 한 게 전부이니, 나는 안고 안기는 데 인색하게 살았다.

`남녀 칠세 부동석`을 가르쳤던 할아버지와 무뚝뚝한 아버지 아래서 나는 목석같은 사내로 자랐다. 포옹이라는 것은 참으로 쑥스러운 짓이었다. 기껏 내가 품에 안는 것은 개, 병아리, 이웃집 네 살배기 정도였다. 그 애도 사랑스러워서가 아니라 레슬링 기술을 걸려고 안았다. 동생을 안아준 것도 한번 뿐이다. 여섯 살 때 태권도장 성탄절 잔치에서, 탈지면 수염 붙인 관장님을 산타클로스로 믿어 “동생 괴롭히면 선물 안 준다”는 협박에 넘어갔다. 남북정상처럼 서로 어정쩡하게 안고 `김치`하며 겨우 웃었다.

의젓함이라든가 남자다움으로 포장된 뻣뻣함은 어느새 결핍이 되어, 사춘기 무렵 나는 노래와 영화를 통해 포옹의 이상향을 그렸다. 김현식의 `내 사랑 내 곁에`를 듣고 “힘겨운 날에 너마저 떠나면 비틀거릴 내가 안길 곳은 어디에”라는 가사에 심취했다. 학원 갔다 오는 길에 콜라 한 잔 마시고 괜히 비틀거려보기도 했다. 컬트의 `너를 품에 안으면`, 박정현의 `꿈에`, 김수희의 `애모`, 영턱스클럽의 `타인`, 김정수의 `당신`까지, 안고 안기는 노래들을 좋아했다.

영화 `록키`에서 피투성이 록키와 애드리안이 껴안는 장면이라든가 `반지의 제왕`에서 물에 빠져 죽을 뻔한 샘과 프로도가 얼싸안는 장면, `주먹이 운다`에서 처절한 복싱 경기 후 류승범이 치매 걸린 할머니(나문희)와 포옹하며 우는 씬은 언제 봐도 감동적이다. `타이타닉`의 뱃머리 포옹은 지금도 배만 타면 흉내 낸다. `러브 액추얼리`가 도입부에 런던 히드로 공항의 일반인들 포옹 장면을 넣은 것도 무척 인상적이다.

대중문화가 내 뻣뻣함을 유연하게 바꿔준 덕도 있지만, 점점 스킨십에 관대해지는, 아니 스킨십을 필요로 하는 사회가 나를 부추기는 듯하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나 힘든 일을 겪은 후배를 안아주는 게 예전처럼 쑥스럽지 않다. 각박한 세상에서 서로의 체온을 나누자며 시작된 `프리허그`가 확산된 영향도 있을 것이다. 나에게 포옹은 여전히 `이벤트`의 영역이지만, 점점 일상의 행위로 바뀌어가길 원한다.

지난 10년 동안 `프리허그`가 참 많았다. 줄 서서 안기기를 기다리는 사람들 중에는 사회가, 국가가 안아주지 않는 취업준비생, 입시생, 미혼모, 비정규직원, 다문화가족, 외국인노동자, 유가족도 있었다. 모든 국민들이 힘겨운 시절에 지쳐 위로 받을 `품`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국가는 한 번도 그 품을 열어주지 않았다. 우리끼리 안고 안기는 프리허그가 그래서 더 특별한 이벤트였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제 포옹이 일상이 되는 사회를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국가가 안아주지 않아서 우리끼리 안는 게 아니라, 국가가 먼저 안아주니 우리도 따라 껴안는 일이 익숙해질 것이다. 팽목항에서 세월호 유가족을 말없이 안아주던 사람, 위험을 무릅쓰고 국민과의 프리허그 약속을 지킨 사람, 그가 지금 메마르고 차가웠던 `국가`의 심장에 눈물과 온기를 채워 넣고 있다. 5·18 기념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돌아가신 아버지께 보내는 편지를 읽으며 눈물 흘린 김소형 씨를 또 가만히 안아주었다.

위에서 언급한 노래 중에 “너를 품에 안으면 힘겨웠던 너의 과거를 느껴”라는 가사가 있는데, 정말 그녀의 아픔을 다 알겠다는 표정이었다. 문재인 정부의 지향점이 어디인지 보여준 장면이다. 국민을 안아주는 나라, 위로와 격려가 더 이상 이벤트가 아닌 나라에 나는 살고 있다. “네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 국가가 너를 안아주네”라고, 한 복음성가의 노랫말을 고쳐본다. 이번 주말에는 만나는 사람마다 넉넉히 안아줄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