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민건<br /><br />대구대 교수·영어교육과
▲ 강민건 대구대 교수·영어교육과

지루한 늦봄의 햇살이 미세먼지에 가려 집밖을 서성이지도 못했던 얼마 전 주말, 스마트 폰을 만지작거리던 아이가 `왜 이리 느린 거야`하며 투정을 부린다.

“오늘은 엄마가 일이 있어 조금 늦는데”라고 무심코 답변을 하고 나서야 나의 답변이 동문서답임을 깨달았다.

`느리다`는 말을 `늦는다`는 말로 알아들은 나의 무성의한 경계심도 그러거니와, 아이의 독백은 답변을 필요로 하지 않는, 스마트 폰 검색 속도가 느리다며 내뱉은 자위 섞인 목소리였다.

다양성과 개성이 넘쳐나는 이 시대의 아이들에게는 아날로그 라디오와 다방의 기억과, 이른바 그 시대의 스마트 폰 역할을 수행했던 `삐삐`(beeper)라고 불리던 기계를 간간히 술자리 안주삼아 이야기를 늘어놓는 40대의 자조가 꼰대의 듣기 싫은 말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빠른 속도의 경쟁시대에 점점 부풀어 오르는 배를 쓰다듬으며 늙어가고 있음을 위로하는 순간에도, 아이들은 스마트 폰 안의 세상과 끊임없는 대화를 하며 새로운 미래 시대를 꿈꾸고 있다.

이른바 개발 논리와 시멘트 문화로 점철되어지는 오늘의 도시 풍경은 요즘 아이들에게는 세련된 그들 문화 안에 섞여 있고, 어쩌면 장년층에게는 이미 사라져 버린 기억의 한 틀로만 남아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한 시인은 `가장 깊은 마음 한 곳`을 통해 회색빛 자욱한 아스팔트 길 위에서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고향을 기억하기도 한다. 그 시절 고향 풍경은 보잘 것 없었음에도 말이다.

또 독일의 어떤 시인은 전쟁을 통해 먼저 죽은 동료들에 대한 기억을 통해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경험하기도 한다.

누군가에게 `기억`은 아련하게 마음이 동요되는 애틋한 것으로 남아 있기도 하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불안과 분노로 비등점을 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요즘 아이들의 기억은 비현실적인 공간에 대한 가상의 기억으로만 남아있다. 드라마와 영화 속 인물들에게 소비하는 감정의 눈물들은 넘쳐나는 맛집과 요리 프로그램에 의해 식욕으로 대체되고, 우리 삶의 기준은 어느새 가상 주인공들에 의해 점거되고 있었다.

이들에게 유년 시절 기억은 아파트와 공장, 편의점과 대형마트 뿐이고 아스팔트 길 위에 부유하는 먼지처럼 기억을 들춰내는 말랑말랑한 감정들은 자극하지도 않는다.

하루하루의 일들, 소소한 것들은 어쩌면 이들에게 자본으로 바꿀 수 없는 가장 지루하고 쓸모없는 일상의 기억일지 모른다. 빠른 속도에 익숙한 아이들의 부재한 기억은 이 사회의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삭제되고 있다.

스마트 폰 속도가 느리다고 투정을 부리던 아이가 냉장고 문을 열어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다. 문득 내가 저 아이만한 시절의 기억이 아이스크림을 통해 투영된다.

초등학교 시절, 학교길에서 흙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오다 땅바닥에 떨어진 동전 하나를 주웠다. 나는 곧바로 인근 파출소에 가 신고를 했다. 경찰 아저씨는 싱거운 웃음과 함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가서 쭈쭈바나 사 먹으라`고 했다.

재차 그 말을 확인하고 쭈쭈바를 자랑스럽게 사 먹으며 집으로 돌아오던 그 길을 기억한다. 그 이후로 나의 어머니는 나에게 잠시 `착한 아이`라고 불러 주었다. 그 때문에 나는 그 시절 어머니의 칭찬을 다시 듣기 위해 착한 일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지금 참으로 편리한 시대는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기형도, `엄마 걱정`) 따위의 그 절절한 기억들은 이미 오래된 소모품처럼 버려지는, 기억들이 사라진 시대를 넘어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