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개화<br /><br />단국대 교수·교양학부
▲ 배개화 단국대 교수·교양학부

지난주 토요일에 필자는 비교문학 관련 학회에 갔다 왔다. 필자는 이 학회의 이사이기는 하지만, 발표나 토론을 하거나 사회를 하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소위 순수한 청중으로 학회에 참석했다. 비교문학학회답게 서로 다른 나라들의 문학 작품을 비교하는 발표가 대다수였다. 필자는 `에즈라 파운드와 동양`이라는 제목의 발표에 흥미를 느껴서 이 발표를 들으면서 고사리를 채취하는 철이 언제인지를 알게 되었다.

에즈라 파운드는 20세기 영미 모더니즘의 선구자로 `이미지즘`이라는 새로운 기법을 시에 도입한 시인이다. 그의 이미지즘은 중국의 한시 번역을 통해서 습득한 기법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는 실제로 많은 한시를 번역하였다. 그는 중국의 유교 경전 중 하나인 `시경`에 실린 시나 백거이, 이백의 한시를 영시로 번역하여, 영어권 독자들에게 소개하였다.

`에즈라 파운드와 동양`의 발표자는 파운드가 `시경`에 실린 `채미`를 번역한 것을 소개하였다. `채미`는 봄에 흉노족과 전투를 벌이기 위해서 고향을 떠나온 군인이 늦가을이 되어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심정을 표현한 것이다. 이 시는 오랑캐와 싸우느라고 지치고 배고픔과 향수병에 시달리는 심정을 표현하고 있다.

필자는 중국 한시에 문외한이기 때문에 한시 옆에 붙은 한글 번역을 중심으로 시를 감상하였다. 그런데 시를 읽다가 보니 3연에서 한글 번역이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3연의 한글 번역은 “고사리 캐세 고사리를 캐세/고사리도 쇠어졌다네/돌아가세 돌아가세/올해도 벌써 시월 양춘이 되었다네/나라 일이 끝나지 않아/쉴 겨를이 없다네/근심하는 마음 큰 병이 되어도/나는 가서 돌아오지 못하네”와 같았다. 이것은 “歲亦陽止(세역양지)” 중 陽을 “시월 양춘(陽春)”으로 번역한 것이다.

시월은 가을이고 양춘은 봄인데, 이게 나란히 있는 것이 이상했다. 그래서 필자는 발표자에게 나물은 보통 봄에 캐는 것인데 `시월`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陽止를 봄으로 해석하면, 시의 앞부분과 뒷부분의 시간적 배경이 일치하지 않아 문제가 발생한다. 시의 마지막 연은 “지난 날 내가 출발할 때/버드나무 무성했는데/이제 내가 돌아갈 생각하니/눈과 비가 흩날린다”이기 때문이다. 이런 시간적 불일치에 혼란을 느끼다 필자는 고사리 캐는 때가 언제인지를 인터넷에서 검색해보았더니, 고사리는 가을부터 이른 봄에 캔다고 나왔다.

파운드는 `陽`을 10월로 번역하였고, 인터넷에 검색되는 채미의 번역들도 모두 10월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필자는 왜 陽이 10월로 번역되는지 너무 궁금했다. 그래서 다시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양월(陽月)이 음력 10월을 뜻한다고 나온다. 발표문에 실린 번역은 중국유학생이 한 것이라고 하는데, 그는 양월의 뜻을 몰랐던 것 같다.

이 일이 있은 후 필자는 주위 사람들에게 고사리 언제 캐는지 아냐고 물으니, 모두 봄에 캐는 것이 아니냐고 답변한다. 심지어는 어떤 사람은 지금, 즉 5월에 캐는 것이 아니냐고 답한다. 필자가 물어본 사람들이 다들 학자들이어서 그런지 고사리가 가을부터 초봄에 캐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모두 농촌에서 성장한 것도 아니고, 수입산 고사리를 사서 먹다보니 고사리를 언제 채취하는지 몰랐던 것이다.

이처럼 우리들 중 다수는 문화적 전통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진 채 살아가고 있다. 가까이 있기 때문에 더 잘 안다고 자만하는 사이에 우리들은 많은 것을 잊어버린 것이다. 반면에 멀리 있는 사람들이 우리의 문화적 전통을 더 잘 이해하는 경우도 있다. `채미`의 번역자인 에즈라 파운드는 양월을 “October(10월)”라고 정확하게 번역하였다. 더구나 그는 시·공간적 간극을 초월하여 2400년 전에 중국에서 살았던 한 `인간의 마음`을 훌륭하게 해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