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강일 서울대 강사
▲ 공강일 서울대 강사

요즘 수영을 배우고 있다. 사실 수영을 처음 시작한 건 벌써 오래 전이다. 그동안 매년 한 번씩은 수영을 배우겠노라고 다짐을 하고서 강습을 신청했지만, 세 번도 채 못가고 포기하곤 했다. 다른 사람들이 수영하는 모습과 내 모습을 비교하면서 “내가 이러려고 수영을 시작했나 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어디에서 근거한 믿음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물개처럼 수영을 잘 한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막상 물속에 들어가면 `물개`가 아니라 그냥 `개`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런 반복을 십 년이나 했다. 그러니까 나의 자괴감은 `근자감`에서 비롯한 자만심에 불과했다. (지난 대통령님도 그래서 자괴감이 들었던 걸까?)

반복적인 포기 속에서도 수영을 완전히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래도 태어났으면 적어도 접영 정도는 해봐야 되지 않을까라는 막연한 생각 때문이다. 다들 아시다시피 영법에는 자유형도 있고 배영도 있고 평영도 있다. 그 중에서도 제일 마지막에 배우는 접영을, 나는 어쩌자고 인간의 기본적인 소양쯤으로 생각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영화 `노킹 온 헤븐스 도어(Knockin` On Heaven`s Door)`는 뇌종양 말기 환자인 마틴과 골수암 말기 환자인 루디가 바다를 보기 위해 병원을 탈출해서 벌어지는 기상천외한 모험을 그리고 있다. 왜 이들이 하필 바다를 보고 싶어 했냐고? 그건 마틴이 어디에서 주워들은 근거 없는 이야기 때문이다. 천국은 너무 무료해서 사람들이 바다 이야기밖에 하지 않는다고, 그래서 바다를 보지 못한 사람은 아무런 이야기도 할 게 없다는 것. 사고뭉치 마틴의 꾐에 순진한 루디는 넘어가고 만다. 왜 하필 접영이냐고? 마틴이 바다를 떠벌리는 데 이유가 없는 것처럼 내게도 이유는 없다. 인생을 살다보면 이유가 없음에도 해야 하는 것들이 있게 마련이다. 접영은 나에게 그런 것이다.

내가 수영에 열의를 보이기까지 많은 시간을 허비한 데는 나름의 곡절이 있다. 수영에 재능이 없다는 것을 알기까지, 아니 정확히 그 사실을 인정하기까지 5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다시 수영은 재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까지, 다른 모든 것들이 그러하듯이 배우고 그 배운 것을 연습해야 한다는 것, 그러니까 노력을 해야 수영을 잘한다는 것을 알기까지 다시 5년이 걸렸다. 그래서 도합 10년이 걸렸다.

나는 수영을 잘한다는 믿음, 이것이 `근자감`이라고 하긴 했으나, 그것이 꼭 근거 없는 믿음인 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동네 친구들과 수영을 하면 나는 꽤나 잘하는 축에 들었기 때문이다. 물에 한 번 들어가면 서너 시간 동안 물에서 놀아도 지겹지 않았다. 나는 누구보다 물을 좋아했고, 물도 나랑 친한 줄로만 알았다.

돌이켜 보면 우물 안 개구리가 따로 없다. 어렸을 때 수영하던 개울은 폭이 채 5m도 되지 않았고, 물이 제일 깊은 곳도 2m가 되지 않았다. 그런 곳에서 수영을 해봤자 얼마나 잘할 것이며, 거기에서 노는 애들의 수영 수준 또한 뻔한 일이 아닌가. 그런데도 친구들이 수영 좀 한다는 말에 우쭐해 하는 꼴이라니, 그 우쭐함을 버리기 싫어 5년씩이나 붙들고 있었다니, 내가 생각해도 한심하기 짝이 없다.

더욱 한심한 건 수영의 관건은 재능이라는 믿음, 수영과 노력은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정말 “어이가 없네!”. 한 번은 수영장에서 혼자 놀고 있는데, 어깨가 떡 벌어진 남자 대여섯 명이 수영장에 들어왔다. 단체로 준비운동을 하더니 차례를 정해서 물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갈 때는 접영, 올 때는 배영, 그리고 다시 갈 때는 평영, 되돌아올 때는 자유형. 그들은 마치 군무를 펼치듯, 일제히 팔을 휘저었고, 발을 찼으며, 물에서 솟구치듯 날아올랐다. 그들은 지치지도 않는지 족히 열 바퀴는 돌았던 것 같다.

그들을 쳐다보다가 들고 있던 킥판을 아무렇게나 팽개치고 수영장을 나오고 말았다. 저들은 내가 가지지 못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고, 아무리 해도 저들만큼 수영을 잘할 수는 없겠구나라며 절망했다. 그런데 저들도 나처럼 수영을 배우기 시작할 때가 있었다는 것, 배운 것을 익숙하게 사용하기 위해서 많은 시간을 들였으리란 것을 나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왜? 수영은 그냥 재능이니까, 노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그런 것이니까. 다시 “어이가 없네!”

 

▲ 언젠가 8월의 밤바다에서 수영을 한 일이 있다. 나는 이것을 밤의 해수욕이라 불렀다. 물은 차지 않았고, 바다 위로 떠오른 달은 떨어질 것처럼 가까웠다. 물이 손끝에서, 발끝에서 갈라지고 있었고, 어둠은 쉼 없이 갈라진 틈을 메웠다. 올해는 수영을, 제대로 밤의 해수욕을 즐길 생각이다.
▲ 언젠가 8월의 밤바다에서 수영을 한 일이 있다. 나는 이것을 밤의 해수욕이라 불렀다. 물은 차지 않았고, 바다 위로 떠오른 달은 떨어질 것처럼 가까웠다. 물이 손끝에서, 발끝에서 갈라지고 있었고, 어둠은 쉼 없이 갈라진 틈을 메웠다. 올해는 수영을, 제대로 밤의 해수욕을 즐길 생각이다.

`그릿`이라는 책을 쓴 앤절라 더크워스는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 “그런데 네가 천재는 아니잖니!”라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였는지는 모르나, 그녀는 성공의 결정적 요인에 관해 연구했다. 그녀는 각계의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를 했고, 그것을 데이터화해서 도표를 그리고 지우길 반복하며 수십 쪽에 이르는 도표를 만들었고, 연구자들과 함께 고민하기도 하면서 십 년이 걸려서야 이론으로 정립했다. 그리하여 탄생한 성취심리학 이론은 다음과 같다.

재능×노력=기술

기술×노력=성취

∴성공=재능×노력2

이 이론은 무지한 내가 보기에도 단순하기 짝이 없다. 성공을 하려면 노력하라는 것. 그런데 이 이론은 단순한 만큼이나 명쾌하다. 재능이 어떤 능력을 얻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는 것을 이 이론은 분명히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성취를 위해서는 그 능력을 다시 갈고 다듬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 또한 분명히 하고 있다. 즉 성취를 위해서는 재능보다는 노력이 더 중요하다.

어떤 일에서 `좀 하는` 사람을 만나기는 쉽다. 언젠가 가수 김윤아가 `위대한 탄생`이라는 TV프로그램에 출연한 적이 있다. 여기에서 그녀는 한 가수 지망생의 멘토로 참여했다. 그 지망생은 말이 지망생이지 수천 명의 경쟁자들을 뚫고 예선에 오른 실력자다. 그런데 이 지망생이 자꾸 연습을 안 해오자 김윤아는 독설을 내뿜는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연습할 시간이 없었다는 변명에 대해 김윤아는 `노래를 하고 싶지 않아도 노래해야 할 순간이 온다`며 일침을 가한다. 가장 강렬했던 말은 그렇게 아무런 연습 없이, 멋있는 척 노래를 부르면, “친구들 사이에서 노래 좀 잘 부르는 친구” 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좀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그러나 `정말 잘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노력해야 한다. 그냥 노력도 아니고 피나는 노력 말이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정말 세상에 천재가 있다면, 재능의 천재가 아니라 노력의 천재일 것이라는 생각. 물론 `노오력`만으로 되지 않는 세상이라는 것쯤은 안다. 그러나 노력할 수 있는 여건이 되는데도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직무유기가 아닐까.